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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연인

시리이 2007. 8. 13. 17:52

 

 

영화명 : 불멸의 연인 (1994)
감독 : 버나드 로즈

출연 :

개봉정보 :
미국영국 로맨스 1995.01.28 15세 관람가 (국내) 120분 (제작국가)

줄거리 : 

루드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 게리 올드만 분)은 1827년에 사망했다. 비엔나 전체는 슬픔의 도가니에 빠지고, 수천명의 군중들이 베토벤의 장례 ..  더보기 

 저작권침해시에는 삭제하겠습니다.

 

 

 악성(樂聖)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2.17~1827.3.26 )년에 사망하자 오스트리아의 빈은 슬픔의 도가니에 빠지고 그의 장례 행렬엔 수천명의 군중들이 몰려든다. 베토벤은 모든 유산을 불멸의 연인에게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겼고, 베토벤의 오랜 친구인 안톤 펠릭스 쉰들러는 불멸의 연인을 찾아 나선다. 쉰들러가 가진 유일한 실마리는 베토벤이 정체 불명의 여인에게 보낸 편지가 전부. 편지의 내용에 따라 쉰들러는 베토벤이 이 여자를 만나기로 했던 칼스버드 호텔로 간다. 쉰들러는 호텔 숙박부에 기재된 서명을 발견하고, 그에 따라 베토벤의 옛 연인이었던 줄리에타 백작, 베토벤의 조카 칼, 베토벤의 형인 카스퍼의 부인 조안나 등 베토벤의 주변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베토벤의 삶과 음악, 사랑에 얽힌 비밀이 베일을 벗는다."
`나의 모든 음악과 모든 재산을 나의 유일한 상속자인 불멸의 연인에게 남긴다`는 천재 음악가 루드비히 반 베토벤의 유서에 따라 그와 절친한 음악가 쉰들러가 `불멸의 연인`을 찾아내기 위해 헤매 다니는 과정 속에서 베토벤의 생애와 사랑 ...........................


-작품해설-
지상의 소리를 천상의 음악으로 승화시킨 악성(樂聖)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일대기를 뜨겁게 타올랐던 연인에 대한 열정과 격렬하고 아름다운 음악으로 그린 영화. 천재 음악가의 고독한 삶 속에 한 여인을 향해 남몰래 불태워진 격정적이고 아름다운 불멸의 사랑이 가슴 벅차게 펼쳐지는 드라마다. 이 영화는 베토벤이 사랑하는 여인과의 만남, 운명적 파경, 청력이 떨어져가는 처절한 고통, 그 속에서 피어난 음악에 대한 열정을 그의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 등으로 전개해 나간다. 베토벤이 사망한 이후, 그가 유산을 전해줄 것을 부탁한 "나의 천사, 나의 모든 것, 나의 분신"이라 일컬어진 베토벤의 숨겨진 '불멸의 연인'을 두고 단 한 장의 편지를 실마리로 베일 속의 여인을 찾아가는 흥미로운 스토리 속에 영화 전체를 관통하여 흐르는 베토벤의 명곡들이 풍부한 감성으로 채워진다. 특히 연극 무대 출신의 성격파 배우 게리 올드먼이 베토벤의 격렬했던 삶을 호연했고, 베토벤이 거쳐간 여인으로 이사벨라 롯셀리니, 발레리아 골리노가 출연한다. 영화의 제작 과정 중 게리 올드만과 이사벨라 롯셀리니가 웨딩마치를 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베토벤의 음악들. 영화에 포함된 아름다운 곡들은 영화의 내용 못지 않게 감미로우며, 비통함과 열정, 사랑과 증오, 그 모든 운명적인 것들을 소리로 전하고 있다. 바이올린에 기돈 크레머, 첼로에 요요마, 피아노에 머레이 퍼레이어 등 당대 거장들이 참여하여 베토벤의 명곡들을 연주했다.음악을 맡은 게오르그 솔티경은 헝가리가 낳은 최대의 지휘자로 카라얀과 번스타인이 서거한 지금, 말 그대로 세계 지휘계의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는 명 지휘자. 베토벤 음악의 권위자로 알려진 그는 1912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제 2차 세계대전 후 독일 각지의 가극장에서 지휘자를 역임하다가 61년 코멘트 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 음악감독을 맡았고 영국 왕실로부터 '경'이란 칭호를 받기도 했다. 영화에서는 교향곡3번(영웅)과 5번(운명), 9번(합창)등을 비롯한 베토벤의 드라마틱한 음악이 전편을 관통하며,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울려 퍼지는 합창은 일찍이 지상의 소리를 천상의 음악으로 승화시켰던 베토벤의 음악적 절정이라고 할 만 하다. '캔디맨'의 버나드 로즈가 감독을 맡고 <스타워즈 2>, 등을 촬영한 피터 스쉬츠키가 새로운 감각의 영상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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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교향곡 7번 해설과 듣기

"나는 인류를 위해 좋은 술을 빚는 바커스(술의 신)이며 그렇게 빚어진 술로 사람들을 취하게 해준다"

궁금하여 찾아보았습니다.

불멸의 연인은 영화를 재미있게 각색한 것이며,  사실은 밝혀진바 없다고 남겨져 있더군요.

출처 


본, 비엔나/ 오스트리아

베토벤은...하이든 ·모차르트와 함께 빈고전파를 대표하는 독일의 작곡가로 고전파의 형식이나 양식을 개성적으로 다듬었고 낭만파로의 이행단계에 있다. 작풍은 동적인 힘이 특징이고 강고한 형식감(形式感)으로 일관되어 곡마다 독자적으로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후기에는 다이내믹한 힘은 부족하지만, 보다 깊은 마음의 세계가 표현되어 있다.
 
국적은  독일 본 . 할아버지 루트비히와 아버지 요한도 음악가였으며 악재(樂才)를 인정한 아버지는 아들의 천재적 소질을 과시하려고 4세 때부터 과중한 연습을 시켰으며, 7세 때에는 피아노 연주회까지 열었다.

 

베토벤은 몇몇 선생의 지도를 받았는데 1779년에 그를 가르친 크리스찬 고트로프 네페로부터는 음악뿐만 아니라 정신적 ·정서적인 영향까지 받았다. 1782년 궁정예배당 오르간 연주자로 출발, 2년 만에 정식 멤버로 임명되고 1787년에는 빈에 가서 흠모하던 모차르트를 만났으나, 어머니의 위독으로 곧 본으로 돌아와 이 해에 끝내 홀아비가 된 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안을 떠맡았다.

 

그러다가 1792년 바르트슈타인백작을 비롯한 친구들의 원조로 빈에 유학, 결국 그 곳이 그의 영주의 땅이 되었다. 빈에 자리 잡은 베토벤은 귀족들의 보호를 받았으며, 셴크 ·알브레히트베르거 ·하이든 ·살리에리 등에게 사사하여 음악가로서의 지식과 능력을 키워 나갔다.

 

1795년 피아노 연주자로서 데뷔하고 이 시기에 최고 작품으로 꼽히는 《피아노 3중주곡》을 발표하여 착실한 첫발을 내디뎠다. 1796년 프라하 ·드레스덴 ·베를린을 여행하고, 1800년에는 《제1교향곡》과 6곡의 현악4중주곡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귓병이 나서 점차 악화하였다. 절망한 그는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쓰고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포기, 작곡에만 전념했으며 두문불출로 외부와의 접촉을 피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제2교향곡》(1802), 오라토리오 《감람산상(橄欖山上)의 그리스도》(1803), 그리고 1804년에는 《제3교향곡(영웅교향곡)》을 작곡하여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개성적인 스타일을 확립하였다.

 

1805년 오페라 《피델리오》의 초연에 실패하고, 이듬해 이를 손질하여 재연하였지만 역시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 작품이 최종적인 형태로 무대에서 인정을 받은 것은 1814년의 일이다. 베토벤의 작품은 빈을 비롯하여 유럽 각지의 출판사가 앞을 다투어 간행하였다. 출판에서의 보수와 귀족들의 지원으로 모차르트와는 달리 안정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후원자로서 특히 유명한 귀족은 루돌프대공(大公), 롭코비츠공작, 킨스키공작 등이었다. 1810년에는 괴테의 극시(劇詩)로 《에그몬트》를 작곡하였다. 그 후에 유명한 《영원한 연인》에 부치는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누구에 대한 것이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으며, 그러한 여성에의 동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영웅교향곡》이 작곡된 이후의 약 10년간은 창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으며, 교향곡 ·서곡 ·협주곡 ·피아노소나타 ·바이올린소나타 ·기타 실내악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씌어진 것들이다. 특히 《제5교향곡(운명교향곡)》(1808) 《제6교향곡(전원교향곡)》(1808) 《피아노협주곡 제5번(황제)》(1809) 《바이올린협주곡》 (3곡, 1806), 피아노곡 《아파시오나토 소나타》(1805) 등이 유명하다.

 

1815년 이후의 12년간은 베토벤의 창작기 중에서 후기에 속한다. 이 무렵에는 정치와 사회 정세의 변화도 있었고, 친지(親知)도 적어졌으며, 또 귓병의 악화로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어 필담(筆談)을 통해서만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그 자신의 연주회 횟수도 줄었고, 빈에서는 보다 가벼운 음악이 애호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일련의 창작활동은 1817년에 가장 저조했으나, 그 이후 다시 힘찬 작곡활동을 계속하여 뛰어난 대작들을 내놓았으며, 루돌프대공에게 바친 《장엄미사곡》(1823)과 합창을 포함한 《제9교향곡》(1824)이 그 정점을 이루었다.

 

장례는 29일에 거행되었는데, 2만을 넘는 시민들이 참가, 애도하였다고 한다. 베토벤은 하이든 ·모차르트와 더불어 빈고전파(古典派)를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확립한 고전파의 형식이나 양식은 베토벤에 의하여 더 개성적으로 다듬어졌으며, 또한 그의 손으로 낭만파에의 이행(移行)도 준비되었다.

 

본 시절에는 만하임악파의 영향 아래 습작적인 작품을 썼으나, 벌써 이때부터 개성적인 특징이 엿보였다. 1800년 전후에는 특히 하이든에게 받은 영향을 나타내면서도 개성적인 스타일의 작품들을 거쳐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하였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이를테면 정적(靜的)인 고전성(古典性)에 비하여 베토벤의 작품은 동적인 다이내믹한 힘을 특징으로 하는데 형식적으로는 강고한 형식감(形式感)으로 일관되어, 곡마다 독자적인 스타일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후기의 창작활동은 중기에 비하여 다이내믹한 힘은 부족하지만, 보다 깊은 마음의 세계가 표현되어 신비스러울 정도의 감동적인 스타일을 보이고 있다. 이 시기는 낭만파의 초기의 대표자들인 베버나 슈베르트의 활동과도 겹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베토벤의 작품들은 그후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후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지금도 그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음악가이면서도 청각을 잃었지만, 이를 극복한 정신력은, 인간의 집념과 생활태도의 귀감으로서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