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사진 알아보자

왼쪽 얼굴의 비밀

시리이 2006. 6. 5. 11:17

초상화는 왜 왼쪽 얼굴이 많은가


1천원, 5천원, 1만원짜리 지폐를 보자. 거기에 그려진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세종대왕은 어떤 모습인가. 왼쪽 뺨과 왼쪽 어깨를 더 많이 드러낸 왼쪽 측면상이다. 현충사에 모셔진 충무공 이순신, 광한루에 있는 춘향, 송광사 국사당의 보조국사 지눌, 여주 신륵사의 나옹선사 등 사당이나 사찰에 모셔진 영정도 거의 대부분 왼쪽 측면상이다. '한국명인초상대관'(이강칠 편, 탐구당, 1972)에 수록된 1백96개의 우리나라 명인 초상화 중에서 단지 6개만이 오른쪽 측면상이다. 정면상 16개를 제외하면 나머지 174개는 모두 왼쪽 측면상이다. 측면상만 따지면 거의 97%가 왼쪽 측면상이요, 겨우 3%만이 오른쪽 측면상이다.


감정은 왼쪽 얼굴에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일까. 호주 멜버른 대학의 심리학자 마이클 니콜스는 1천5백점의 초상화와 수십장의 얼굴사진을 비교한 결과 여성의 68%, 남성의 56%가 왼쪽 얼굴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한국명인초상대관'의 97%와는 차이가 있지만, 왼쪽 얼굴이 더 많은 것은 분명하다. 연구팀이 밝힌 이유는 "감정이나 인상이 왼쪽 얼굴에 더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정표현은 우뇌가 관장한다. 그리고 우뇌는 신체의 좌측을 관장한다. 때문에 왼쪽얼굴의 근육은 우뇌의 지배를 받아 감정의 변화가 왼쪽 얼굴에 잘 나타난다. 화가나 사진사가 "활짝 웃어요" 하면 무의식적으로 왼쪽얼굴을 상대에게 보이게 되고, 이것이 화가나 사진사에게 포착된다는 것이다. 서울교대 미술교육과 조용진 교수에 따르면, 간지럼 반응을 살펴 왼쪽얼굴이 우뇌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더 잘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피실험자의 목 뒷덜미를 손가락으로 가만히 긁어주면 간지러워 웃음이 나오는데, 이때 먼저 움직이는 것은 십중팔구 왼쪽 얼굴근육이라는 것이다.


뇌의 작용도 한 몫

표정이 왼쪽 얼굴에 잘 나타나고 모델이 자연스럽게 왼쪽 얼굴을 화가에게 보인다는 것은 모델의 입장에서 내놓은 설명이다. 그런데 화가의 입장에서도 왼쪽 중심의 얼굴을 선호하게 되는 이유가 있다. 조용진 교수에 따르면, 그림을 그리는 뇌는 주로 우뇌라고 한다.

모델이 왼쪽 얼굴을 화가에게 보이면 모델의 눈, 코, 입은 망막의 오른쪽에 상이 맺히고 뒷덜미와 왼쪽 귀는 망막의 왼쪽에 상이 맺힌다. 뇌는 눈에 보이는 모습을 전체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좌우를 각각 따로 인식해서 뇌 속에서 종합한다. 때문에 망막의 오른쪽에 맺힌 상은 오른쪽 뇌로 들어가고 왼쪽에 맺힌 상은 왼쪽 뇌로 들어가서 이들이 합쳐져 종합된 상을 형성한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오른쪽 뇌가 주도하는데, 이 때문에 오른쪽 뇌로 들어온 시야의 왼쪽 상, 즉 눈, 코, 입 등이 잘 그려지는 것이다. 뇌의 작용원리상 사람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이목구비가 중심축보다 왼쪽에 놓여야 화가가 가장 잘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다름 아닌 왼쪽 얼굴 중심의 측면상이 된다.


서양보다 오른손 선호

이와 같은 이유에도 불구하고 '한국명인초상대관'에서 왼쪽 얼굴 중심의 측면상이 97%라는 수치는 너무 과한 것 같다. 지난 1999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에 선정된 인물화가 김호석씨는 자신이 직접 답사한 우리나라 각지의 사당에 모셔진 초상화의 80% 이상이 왼쪽 뺨을 중심으로 그려졌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80%든 97%든 한국의 초상화에서 왼쪽 측면상의 비율은 맬버른 대학 연구팀이 제시한 것과 상당히 차이가 난다.

바로 여기에 문화적의 차이와 화가의 선호가 개입한다. 우리나라 초상화의 대부분은 오른손잡이 화가가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에서 오른쪽은 바른쪽과 통한다. 오른쪽은 옳고 왼쪽은 그른 것처럼 오른쪽에 대한 선호가 대단히 강하다. 물론 서양에서도 왼쪽을 뜻하는 sinister는 불길함과 사악함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어렸을 때 왼손으로 숟가락질을 하면 '복 달아난다'고 핀잔하며 기어코 오른쪽을 쓰게 만드는 우리나라에 비해 서양에서는 그다지 심하게 오른쪽을 강요하지 않는다. 왼손 글씨로 기록을 남긴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르네상스 시대의 대 화가 미켈란젤로, 그리고 현대의 피카소는 왼손잡이로 유명하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왼손으로 서명하는 장면을 TV에서 쉽게 접할 정도로 서양은 왼손 사용에 상당히 너그러운 편이다.


오른손잡이 화가에 왼쪽 측면상

오른손잡이는 오른손에 연필과 붓을 잡고 모델의 왼쪽 얼굴을 중심으로 그림을 그리기가 십상이다. 콧날을 그리고 눈을 그리면서 캔버스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려나간다. 당연히 완성된 그림은 왼쪽 측면상이 된다.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사진을 찍다시피 정확하고 자세하게 인물을 표현하기로 유명한 이상원 화백('동해인' 연작이 유명)도 "왼쪽 얼굴을 중심으로 하는 측면상을 많이 그리게 된다"고 말한다. 정면얼굴보다는 측면얼굴이 굴곡과 명암이 있어서 그리기가 쉽고, 오른손잡이 화가에게는 측면상 중에서도 왼쪽 얼굴을 중심으로 그리는 것이 쉬워 자연스럽게 왼쪽 측면상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씨의 지적은 좀더 구체적이다. 화가가 사람의 얼굴을 그릴 때는 보통 눈, 코, 입의 윤곽이 중요하므로 이를 먼저 그리게 된다. 왼쪽 얼굴을 중심으로 측면상을 그리면 왼쪽에 이목구비가 몰려있어 이들을 그리고 난 후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이동해가면서 왼쪽 뺨, 귀, 머리, 오른쪽 윤곽 순으로 그려나간다. 이렇게 하면 손의 움직임도 편할 뿐 아니라 그리는 도중 목탄이나 물감이 손에 묻을 확률도 줄어든다는 것이다.

동양인은 약8%, 서양인은 약 11%가 왼손잡이로 조사되고 있다. 이것도 서양의 초상화가 우리나라의 초상화보다 왼쪽 측면상에 덜 편향된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해준다.


동서양의 예술관 차이

이주헌씨는 동서양에서 왼쪽측면상의 비율이 차이나는 것은 화풍이나 화법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동서양의 초상화는 사람의 얼굴을 실제와 똑같이 그린다는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서양의 목표가 실제와 똑같은 육체를 화면에 표현하는 것이었다면, 동양의 목표는 모델의 정신과 인격까지 표현하려는 조금은 형이상학적인 것이었다. 당연히 서양에서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해부학이나 원근법, 명암법, 단축법 등 과학적인 원리를 총동원해서 초상화를 그렸다. 그런 점에서 서양의 초상화는 우리나라의 초상화보다 실제의 모델을 더 사실적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초상화는 대상 자체의 1차적인 사실성도 중요했지만, 전신(傳神), 즉 그 사람의 인품과 정신을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그러므로 해부학을 연구해서 얼굴근육의 정확한 위치와 움직임을 정밀하게 관찰하고 묘사하려는 서양의 추구와는 달리, 얼굴은 평면적이고 자세는 딱딱하지만 그림 전체에서 풍기는 인물의 기품을 숭상했다. 때문에 관습적으로 굳어진 왼쪽 측면상 형식을 바꿔야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서양의 초상화는 늘 새로운 지식과 기법을 도입하고 시험해 훨씬 다양한 자세와 표정이 나올 수 있었다. 화가들은 당연히 의도적으로 오른쪽 얼굴을 그리려고 시도했다. 서양이 우리의 초상화에 비해 좌측 편향을 덜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용훈(서울대강사, 과학사), <물구나무 과학>(2000, 문학과 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