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노트/마음의 뜨락

법정 잠언집

시리이 2006. 6. 14. 16:49

    날마다 행복하소서!

    장마가 시작 되었나 봅니다 습습한 기온으로 서늘함도 느껴지는 하루 마음은 뽀송뽀송하게 상쾌하신 시간으로 채워가십시요.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한 권의 책을 모두 담았습니다. 읽고 다시 읽었고 그리고 이렇게 남겨보았답니다. 머리 속에 얼마나 남아있을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찌보면 이 또한 욕심이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_()_ 영혼을 맑게 하는 이 잠언들은 그의 산문과 법문에서 한 편 한 편 가려 뽑은글들이다. 그는 말한다. "살 때는 삶에 철저해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 죽을 때는 죽음에 철저해 그 전부가 죽어야 한다." 이 잠언집을 엮은 류시화는 시인으로 시집-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잠언시집-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치유의 시집-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산문집-삶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이 있다 인디언 추장 연설문 모음집-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인도여행기-하늘호수로 떠난 여행, 지구별 여행자를 썼으며, 법정 스님 법문집-산에는 꽃이 피네를 엮었다. 옮긴 책-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티벳 사자의 서, 조화로운 삶,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 용서등이 있다. www.shivaryu.co.kr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뒷모습 늘 가까이 있어도 눈 속의 눈으로 보이는, 눈을 감을수록 더욱 뚜렷이 나타는 모습이 뒷모습이다. 이 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 그리고 이 뒷모습을 볼 줄 아는 눈을 길러야 한다. 앞모습은 허상이고 뒷모습이야말로 실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눈을 가진 사람 진실한 믿음을 갖고 삶을 신뢰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흔들림이 없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근거 없이 떠도는 말에 좌우됨이 없다. 가짜에 속지 않을 뿐더러 진짜를 만나더라도 거기에 얽매이거나 현혹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눈을 맑히고 자신의 눈으로 보고 판단한다. 그는 비본질적인 일에 한눈을 팔지 않는다. 무엇때문에 세상을 사는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지 때때로 헤아려 본다. 자기 삶의 질서를 지니고 사는 자주적인 인간은 남의 말에 팔리지 않는다. 누가 귀에 거슬리는 비난을 하든 달콤한 칭찬을 하든, 그것은 그와는 상관이 없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지나가는 한때의 바람이다. 그는 일시적인 바람에 속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바람을 향해서 화내고 즐거워한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허수아비나 인형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타율에 의해 억지로 참는 일이 아니다. 자기를 지키는 것은 곧 자신의 질서이다. 그릭 자기 삶의 양식이다. 자신의 질서요, 삶의 양식이기 때문에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남을 괴롭힐 수 없으며, 또한 남한테서 괴로움을 받을 일도 없다. 눈을 뜨라. 누가 내 눈을 감겼는가. 사물을 내 스스로 보지 못하고 남의 눈으로 보아 온 그릇된 버릇에서 벗어나야 한다. 활짝 열린 눈에는 티끌 하나도 묻을 수 없다. 내 눈이 열려야 열린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 -눈꽃 잎이 져버린 빈 가지에 생겨난 설화를 보고 있으면 텅 빈 충만감이 차오른다. 아무것도 지닌 것 없는 빈 가지이기에 거기, 아름다운 눈꽃이 피어난 것이다. 잎이 달린 상록수에서 그런 아름다움은 찾아보기 어렵다. 거기에는 이미 매달려 있는 것들이 있어 더 보탤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만남 사람은 엄마에게서 태어난 것만으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동물적 나이만 있을 뿐 인간으로서의 정신 연령은 부재다. 반드시 어떤 만남에 의해서만 인간이 성장하고 또 형성된다. 그것이 사람이든 책이든 혹은 사상이든 만남에 의해 거듭거듭 형성해 나간다. 만난다는 것은 곧 눈뜸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세계가 새롭게 열리고 생명의 줄기가 푸르게 용솟음친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비로소 인식하는 것이다. 산문스런 시정의 거리에는 저마다 누구를 만나러 감인지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생명의 환희와 감사의 마음이 따르지 않는 것은 다만 마주치는 거이요, 사교일 따름이다. 만나는 데는 구도자적인 엄숙한 자세가 있어야 한다. 나의 본질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삶을 이루어 나갈 것인가? 이런 의식을 지니고 찾아 헤맬 때에만 만남은 이루어진다. 나 하나를 어쩌지 못해 몇 밤이고 뜬눈으로 밝히는 그러한 사람만이 만날 수 있다. 만난 사람은 그때부터 혼자가 아니다. 그는 단수單數의 고독에서 벗어나 복수複數의 환희에 설레면서 맑게맑게 그리고 깊게깊게 승화한다. -중심에서 사는 사람 거죽은 언젠가 늙고 허물어진다. 그러나 중심은 늘 새롭다. 영혼에는 나이가 엇다. 영혼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그런 빛이다. 어떻게 늙는가가 중요하다. 자기 인생을 어떻게 보내는가가 중요하다. 거죽은 신경 쓸 필요가 업다. 중심은 늘 새롭다. 거죽에서 살지 않고 중심에서 사는 사람은 어떤 세월 속에서도 시들거나 허물어지지 않는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우주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움직이고 흐르면서 변화한다. 한 곳에 정지된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해와 달이 그렇고 별자리도 늘 변한다. 우리가 기대고 있는 이 지구도 우주 공간에서 늘 살아 움직이고 있다. 무상하다는 말은 허망하다는 것이 아니라 '항상하지 않다', '여원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우주의 실상이다. 변화의 과정 속에 생명이 깃들고, 변화의 과정을 통해 우주의 신비와 삶의 묘미가 전개된다. 만일 변함이 없이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다면 그것은 곧 숨이 멎은 죽음이다. 살아 있는 것은 끝없이 변하면서 거듭거듭 형성되어 간다. 봄이 가고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그와 같이 순환한다. 그것은 살아있는 우주의 호흡이며 율동이다. 그러므로 지나가는 세월을 아쉬워할 게 아니라 오는 세월을 잘 쓸 줄 아는 삶의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채우려고만 하는 생각을 일단 놓아 버리고 텅 비울 때 새로운 눈이 뜨이고 밝은 귀가 열릴 수 있다. 눈에 보익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영역은 전체에서 볼 때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존재의 실상을 인식하려면 눈에 보이는 부분과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두루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육지를 바로 보려면 바다도 함께 보아야 하고 밝은 것을 보려면 어두운 것도 동시에 볼 줄 알아야 한다. -텅 빈 고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에 들어가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텅 빈 공간에서 순수한 현재를 발견할 수 있음을. 성당과 모스크와 절간에 어던 성스러움이 잇다면 그것은 바로 이 텅 빈 현재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이 텅 빈 고요. 이런 텅 빈 현재와 고요 속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귓속에 귀를 대고 미국의 철학자 마르쿠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풍요로운 감옥에 비유했다. 감옥 속에 냉장고와 세탁기가 갖춰져 있고 텔레비젼 수상기와 오디오가 놓여 있다. 그속에서 살고 잇는 우리들은 자신이 그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이런 풍요로운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어떤 것이 진정한 인간이고,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근원적인 물음 앞에 마주서야 한다. 그런 물음과 대면하지 않으면 진정한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없다. 항상 자신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나는 누구인가 자신의 속얼굴이 드러날 때까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건성을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귓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 그러나 묻지 않고는 그 해답을 이끌어 낼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거듭거듭 물어야 한다. -글자 없는 책 책을 대할 때는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자신을 읽는 일로 이어져야 하고 잠든 영혼을 일깨워 보다 가치 있는 삶으로 눈을 떠야 한다. 그때 비로소, 펼쳐 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는 그런 책까지도 읽을 수 있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책 속에서 그 길을 찾으라. -나의 꿈 나는 아직도 이런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 다음 어딘가 물 좋고 산 좋은 곳에 집을 한 채 짓고 싶다. 사람이 살기에 최소한의 공간이면 족하다. 흙과 나무와 풀과 돌, 그리고 종이만으로 집의 자재를 삼을 것이다. 흙벽돌을 찍어 토담집을 짓고, 방 한 칸, 마루 한 칸, 부엌 한 칸이면 더 바랄 게 없다. 아, 나는 이렇게 꿈을 지니고 있다. 이런 내 꿈이 금생에 이루어질지 아니면 내생에나 가서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런 꿈이 설사 희망 사항에 그친다 할지라도 지금 나는 풋풋하게 행복하다. -살아 있는 선 선禪이란 밖에서 얻어들은 지식이나 이론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 스스로 깨닫는 일이다.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것, 철저한 자기 응시를 통해 자기 안에 잠들어 있는 무한한 창조력을 일깨우는 작업이다. 그래서 선을 가르켜 지식이 아니라 체험이라고 했다. 이 무한한 창조력이 사랑이라는 온도와 지혜라는 빛으로써 타인을 향해 발휘될 때 선은 일상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선방 안에서만 통하는 선이라면 뒤주 속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다. 뒤주 속에 살아 나갈 길을 찾아 인간의 거리로 뛰쳐나와야만 비로소 창조적인 기능을 할 수 있다. 창백한 좌불은 많아도 살아 움직이는 활불活彿이 아쉬운 오늘이다. -산에 오르면 산에 오르면 사람들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무의미한 말의 장난에서 벗어나 입 다물고 자연의 일부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밖으로만 향했던 눈과 귀와 생각을 안으로 거두어들여야 한다. 그저 열린 마음으로 무심히 둘레를 바라보면서 쉬어야 한다. 복잡한 생각은 내려놓고 가장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의 숨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인간의 언어로 인해서 지금까지 밖으로만 향했던 눈과 귀와 생각을 안으로 거두어들여야 한다. 그저 열린 마음으로 무심히 둘레를 바라보면서 쉬어야 한다. 복잡한 생각은 내려놓고 가장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의 숨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인간의 언어로 인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얼마나 눈멀어 왔고 귀먹어 왔는지 냉정하게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남의 얼굴만을 쳐다보다가 자신의 얼굴을 까맣게 잊어버리지 않았는지 돌이켜 보아야 ㅎ나다. 남의 말에 팔리지 말고 자기 눈을 보고 자신으 귀로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이룰 수 없다. 자연은 때 묻고 지친 사람들을 맑혀 주고 쉬도록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 품안에 가까이 다가가 안기기만 하면 된다. -함께 있다는 것 함께 있고 싶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일 뿐 인간은 본질적으로 혼자일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사람은 누구나 홀로 태어난다. 그리고 죽을 때도 혼자서 죽어 간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도 혼자서 살 수 밖에 없다.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도 저마다 홀로 서 있듯이, 인간 역시 무한 고독의 존재이다. 사람은 저마다 업이 다르기 때문에 생각을 따로 해야 하고 행동도 같이할 수 없다. 인연에 따라 모였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게 마련이다. 물론 인연의 주재자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다. 이것은 어떤 종교의 도그마이기에 앞서 무향겁을 두고 되풀이될 우주 질서 같은 것이다. 모든 현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하기 때문이다. 늘 함께 있고 싶은 희망 사항이 지속되려면, 서를 들여다보려고만 하는 시선을 같은 방향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서로 얽어매기보다는 혼자 있게 할 일이다. 현악기의 줄들이 한 곡조에 울리면서도 그 줄은 따로이듯이, 그런 떨어짐이 있어야 한다. -속뜰에서 피는 꽃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산마루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 속뜰에서는 맑은 수액이 흐르고, 향기로운 꽃이 피어난다. 혼자서 묵묵히 숲을 내다보고 있을 때 내 자신도 한 그루 정정한 나무가 된다. 아무 생각없이 빈 마음으로 자연을 대하고 있으면 그저 넉넉하고 충만할 뿐 결코 무료하지 않다. 이런 시간이 나는 무엇엔가 그지없이 감사드리고 싶어진다. 하루 스물네 시간 중 맑고 잔잔한 이런 여백이 없다면 내 삶은 탄력을 잃고 이내 시들고 말 것이다. -생의 밀도 지식이 지혜로 깊어지려면 순수한 집중을 통해 생의 밀도를 의식해야 한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자기 자신에 대해 근원적인 물음을 던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외부의 정보에서 벗어나 자기 마음속 소리를 들어야 한다. 홀로 있는 시간은 본래의 자기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이다. 발가벗은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기이다. 하루하루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비춰볼 수 있는 거울 앞이다. 그리고 내 영혼의 무게가 얼마쯤 나가는지 달아볼 수 있는 그런 시간이기도 하다. -간소하게 더 간소하게 단순과 간소는 다른 말로 하면 침묵의 세계이다. 또한 텅 빈 공의 세계이다. 텅 빈 충만의 경지이다. 여백과 공간의 아름다움이 이 단순과 간소에 있다. 인간은 흔히 무엇이든 넘치도록 가득 채우려고만 하지 텅 비우려고는 하지 않는다. 텅 비어야 그 안에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우리는 비울 줄을 모르고 가진 것에 집착한다. 텅 비어야 새로운 것이 들어찬다. 모든 것을 포기할 때, 한 생각을 버리고 모든것을 포기할 때 진정으로 거기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텅 비었을 때,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비었을 때 그 단순한 충만감, 그것이 바로 극락이다. -이 자리에 살아 있음 우리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아 있음이다. 어제나 내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이 자리에 있음이다. 우리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남을 뜻한다.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알아차릴 때 죽음은 결코 삶과 낮설지 않다. 우리는 죽음 없이는 살 수 없다. 순간순간 심리적으로 죽지 않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삶을 이룰 수 없다. 오늘이 어제의 연속이 아니라 새날이요. 새 아침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도반 진정한 도반은 내 영혼의 얼굴이다. 내 마음으 소망이 응답한 것 도반을 위해 나직이 기도할 때 두 영혼은 하나가 된다. 맑고 투명하게 서로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도반 사이에는 말이 없어도 모든 생각과 소원과 기대가 소리없는 기쁨으로 교류된다. 이때 비로소 눈과 마음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하나가 된다. -가장 큰 악덕 '사람이 항상 나물 부리를 씹어 먹을 수 있다면 백 가지 일을 이룰 수 있다.' 기름지게 먹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죽을 때까지 알 수 없겠지만. 담백하게 먹는 사람들은 이 말뜻을 이내 알아차릴 것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우리 몸에 들어가 살이 되고 피가 되고 뼈가 된다.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음식물이 지닌 업까지도 함께 먹어 그 사람의 체질과 성격을 형성한다. 살아 있는 생명를 괴롭히거나 살해하는 것은 악덕 중에서도 가장 큰 악덕이다. 언제 어디서나 이 우주에 가득 차 있는 진리의 혼을 보려면 가장 하잘것없는 미물일지라도 내몸처럼 아끼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깨어 있는 사람 행복은 단순한 데 있다. 가을날 창호지를 바르면서 아무 방해 받지 않고 창에 오후의 햇살이 비쳐들 때 얼마나 아늑학 좋은가. 이것이 행복의 조건이다. 그 행복의 조건을 도배사에게 맡겨 버리면 스스로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자기가 해야 한다. 도배가 되었든 청소가 되었든 집 고치는 일이 되었든 내손을 할 때 행복을 경험한다. 그것을 남게 맡겨 버리면 내게 주어진 행복의 소재가 소멸된다. 행복하려면 조촐한 삶과 드높은 영혼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몸에 대해서는 얼마나 애지중지하는가. 얼굴에 기미가 끼었는가 말랐는가. 체중이 얼마 불었느가 줄었는가에 최대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자신의 정신의 무게가, 정신의 투명도가 어떤가에는 거의 무관심하다. 내 정신이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는 사람만이 자기 몫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 자기 분수를 헤아려 삶의 질을 높여 갈 수 있다. -가뭄으로 잦아드는 논물 같은 죽음은 과일 속에 들어 있는 씨앗처럼 살과 함께 살아간다.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을 잊어버리지 않느다면 생에 대한 길은 존경과 성실성도 잃지 않는다. 생명이 지닌 밝고 앎답고 선한 가능성을 일깨우지 않고 자기 한 몸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풀을 뜯다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와 다르지 않다. '오늘의 나는 무엇인가'를 되돌아볼 수 있어야 ㅎ낟. 과연 나는 하루하루를 사람답게 살고 있는가? 내가 지닌 있는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면서 나답게 살고 있는가? 내가 허락 받은 목숨은 가뭄으로 잦아드는 논물과 같다. -인연 인연이란 마음밭에 씨 뿌리는 것과 같아서 그 씨앗에 새로운 움이 트고 잎이 펼쳐진다. 인연이란 이렇듯 미묘힌 얽힘이다. -직선과 곡선 사람의 손이 빚어낸 문명은 직선이다. 그러나 본해 자연은 곡선이다. 인생의 길도 곡선이다. 끝이 빤히 내다보인다면 무슨 살맛이 나겠는가. 모르기 때문에 살맛이 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곡선의 묘미이다. 직선은 조급, 냉혹, 비어함이 특징이지만 곡선은 여유, 인정, 운치가 속성이다. 주어진 상황 안에서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 그것 역시 곡선의 묘미이다. 때로는 천천히 돌아가기도 하고 어정거리고 길 잃고 헤매면서 목적이 아니라 과정을 충실히 깨닫고 사는 삶의 기술이 필요하다. -부드러운 것이 단단함을 이긴다. 임조을 앞둔 늙은 스승이 마지막 가르침을 주기 위해 제자를 불렀다. 스승은 자신의 입을 벌려 제자에게 보여 주며 물었다. '내 입 안에 무엇이 보이느냐?' '혀가 보입니다.' '이는 보이지 않느냐?' '스승님의 치아는 다빠지고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는 다 빠직 없는데 혀는 남아 있는 이유를 알겠느냐?' '이는 단다하기 때문에 빠져 버리고 혀는 부드러운 덕분에 오래 남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스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것, 이것이 세상 사는 지혜의 전부이다. 이제 더 이상 너에게 가르쳐 줄 것이 없다. 그것을 명심해라.' -빈 그릇에서 배운다. 이 가을 들어 나는 빈 그릇으로 명상을 하고 있다. 서쪽 창문 아래 조그만 항아리와 과반을 두고 벽에 기대어 이만치서 바라본다. 며칠 전에 항아리에 들꽃을 꽂아 보았더니 항아리가 싫어하는 내색을 보였다. 빈 항아리라야 무한한 충만감을 느낄 수 있다. 텅 빈 항아리와 아무것도 로려 있지 않은 빈 과반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 마음도 언새 텅 비게 된다. 무념무상, 무엇인가를 채웠을 때보다 비웠을 때의 이 충만감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하던가. 텅 빈 충만의 경지이다. 빈 그릇에서 배운다. -꽃과의 대화 서로의 향기로써 대활르 나누는 꽃에 비해 인간은 말이나 숨결로써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꽃이 훨씬 우아한 방법으로 서로를 느낀다. 어느 해 가을, 개울가에 다른 꽃은 다 지고 없는데 용담이 한 그루 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그 꽃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몹시 궁금했다. 입 다물고 있는 용담의 꽃봉오리에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나는 네 방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한데 한번 보여주지 않을래? 하고 청을 했다. 다음 날 무심코 개울가에 나갔다가 그 용담을 보았더니 놀랍게도 꽃잎을 활짝 열고 그 안을 보여 주었다. 어떤 대상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그 대상을 사랑해야 한다. 이쪽에서 따뜻한 마음을 열어 보여야 저쪽 마음도 열린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서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배경 인간은 누구나 숲이나 나무 그늘에 들면 착해지려고 한다. 콘크리트 벽 속이나 아스팔트 위에서는 곧잘 하던 거짓말도, 선하디 선하게 서 있는 나무 아래서는 차마 할 수가 없다. 차분해진 목소리로 영원한 기쁨을 이야기하고,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가를 헤아리게 된다. 소음의 틈바구니에서 분주히 뛰어다닉 있는 일상의 자신이 훤히 드러나 보인다. 인간의 배경은 소음과 먼지에 싸여 피곤하기만 한 도시의 문명일 수 없다. 나무와 새와 물과 구름, 그리고 별들이 수놓인 의연한 자연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자연으로부터 그 질서와 겸허와 미덕을 배워야 한다. -눈 속에 꽃을 찾아가는 사람 눈 속에 꽃을 찾아가는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꽃다운 것인가. 꽃을 가꿀 만한 뜰을 갖지 못한 현대의 도시인들은 때로는 꽃시장에라도 가서 싱그럽게 피어나는 꽃을 볼 일이다. 맑고 향기롭게 피어 있는 꽃의 아름다움을 즐길 뿐 아니라. 자신의 삶에도 이런 맑음과 향기와 운치가 있는지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끝없는 탈출 자기를 가둔 감옥에서 탈출하려면 무엇보다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한다. 자기 인생에 대한 각성 없이는 벗어날 기약이 없다. 깨어 있는 사람만이 자기 몫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있고, 깨어 있는 사람만이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끝없는 탈출을 시도한다. 참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욕구를 충족시키는 생활이 아니라 의미를 채우는 삶이어야 한다. 의미를 채우지 않으면 삶은 빈 껍질이다. -그냥 바라보는 기쁨 만일 이 산이 내 소유라면 그 소유 관념으로 인해 잔잔한 기쁨과 충만한 여유를 즉각 반납하게 될 것이다. 등기부에 기재해 관리해야 할 걱정, 세금을 물어야 하는 부담감 또는 어느 골짜기에 병충해는 없을까, 나무를 몰래 베어 가는 사람은 없을까 해서 한시도 마음이 놓이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도 이 산은 내 개인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 놓고 바라볼 수 있고 내 뜰처럼 즐길 수 있다. 차지하는 것과 보고 즐기는 것은 이처럼 그 틀이 다르다. -알몸이 되라 옛 스승은, 아무것도 걸치지 말고 훨훨 벗어 던져 알몸이 되라고 한다. '알몸'이라는 옷을 걸치려고 한다. 진정한 알몸은 어떤 옷이든 마음대로 입엇다 벗었다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어떤 연장이든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옛 스승은 이것을 '경계를 타는 사람'이라고 했다. 어떤 결함도 없는 완전한 인간이란 완전이라고 하는 데에도 머물지 않는 사람이다. 완전이란 이미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라 시시각각 새로운 창조이기 때문이다. -소유로부터의 자유 사랑은 내 마음이 따뜻해직 풋풋해지고 더 자비스러워지고 상대방이 좋아할 게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에 고통이 따른다. 누구나 자기 집에 도자기 한두 점을 놓아두고 싶고 좋은 그림 걸어 두고 싶어하지만 일주일 정도 지나면 거기 그림이 잇는지도 잊어버린다. 소유란 그런 것이다. 손안에 넣는 순간 흥미가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단지 바라보는 것은 아무 부담없이 보면서 오래도록 즐길 수 있다.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사랑도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창조하는 일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일,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자신을 만들어 간다. 이 창조의 노력이 멎을 때 나무든 사람이든 늙음과 질병과 죽음이 온다. 겉으로 보기에 나무들은 표정을 잃으 채 덤덤히 서 있는 것 같지만 안으로는 잠시도 창조의 손을 멈추지 않는다. 따의 은밀한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새봄의 싹을 마련하고 있는 것ㅇ디ㅏ. 시절 인연이 오면 안으로 다스리던 생명력을 대지 위에 활짝 펼쳐 보일 것이다. -자연 앞에서 1 고요하고 적적한 것은 자연의 본래 모습이다. 달빛이 산방에 들와 귀 기울이며 달의 숨소리를 듣고자 하는 것도 이 모두가 무심이다. 바람이 불고, 꽃이 치었다가 지고, 구름이 일고, 안개가 피어오르고, 강물이 얼었다가 풀리는 것도 또한 자연의 무심이다. 이런 일을 누가 참전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자연 앞에 무심히 귀를 기울일 뿐.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려면 입 다물고 그저 무심히 귀를 기울이면 된다. 무심히 귀를 기울이라. 2 자연은 우리 인간에게 영원한 어머니일 뿐 아니라 위대한 교사이다. 자연에는 그 나름의 뚜렷한 질서가 있다. 자연은 말없이 우리에게 많은 깨우침을 준다. 자연 앞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얄팍한 지식 같은 것은 접어 두어야 한다. 그래야 침묵 속에서 우주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 침묵이야말로 자연의 말이고 우주의 언어이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침묵의 이미를 배워야 한다. 그리하여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깨달아야 한다. -친구 친구사이의 만남에는 서로 영혼의 울림을 주고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너무 자주 만나게 되면 어느 쪽이나 그 무게를 축적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마음의 그림자처럼 함께할 수 있는 그런 사이가 좋은 친구이다. 만남에는 그리움이 따라야 한다. 그리움이 딸지 않는 만남은 이내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진정한 친구란 두 개의 육체가 깃든 하나의 영혼이란 말이 있다. 그런 친구 사이는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결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척에 살면서도 일체감을 함께 누릴 수 없다면 그건 진정한 친구일 수 없다. 진정한 만남은 상호간의 눈뜸이다. 영혼의 진동이 없으면 그건 만남이 아니라 한때의 마주침이다. 그런 만남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가꾸고 다스려야 한다. 좋은 친구를 만나려면 먼저 나 자신이 좋은 친구감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친구란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하나- 내 마음 따로 있고 네 마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하나이다. 한 뿌리에서 파생된 가지가 곧 내 마음이고 당신의 마음이다. 불우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가 눈물짓는 것도 그 때문이다. 왜냐하면 같은 뿌리에서 나누어진 한쪽 가지가 그렇게 아파하기 때문에 함께 아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의 울림이다. 마음이 맑고 투명해야 평온과 안정을 갖는다. 마음의 평화와 안정이야말로 행복과 자유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참된 앎 경전이나 종교적인 이론은 공허하고 메마르다. 그것은 참된 앎이 아니다. 참된 앎이란 타인에게서 빌려온 지식이 아니라 내 자신이 몸소 부딪쳐 체험한 것이어야 한다. 다른 무엇을 거쳐 아는 것은 기억이지 앎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안 것을 내가 긁어모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내 것'이 될 수 없다. -내 자신이 부끄러울 때 내 자신이 몹시 초라라고 부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맣은 것을 갖고 있는 사람 앞에 섰을 때는 결코 아니다. 나보다 훨씬 적게 가졌어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 앞에 섰을 때이다. 그때 내 자신이 몹시 초라하고 가난하게 되돌아보인다.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는 사람 앞에 섰을 때 나는 기가 죽지 않는다. 내가 기가 죽을 때는, 내 자신의 가난함을 느낄 때는, 나보다 훨씬 적게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여전히 당당함을 잃지 않는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엇다. 어떤 어려운 일도 어떤 즐거운 일도 영원하지 않다. 모두 한때이다. 한 생애를 통해 어려움만 지속된다면 누가 감내하겠는가. 다 도중에 하차하고 말 것이다 좋은 일도 그렇다. 좋은 일도 늘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러면 사람이 오만해진다. 어려운 때일수록 낙천적인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 덜 갖고도 더 많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전에는 무심히 관심 갖지 않던 인간관계도 더욱 살뜰히 챙겨야 한다. 더 검소하고 작은 것으로써 기쁨을 느껴야 한다. 삶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어떤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일이다.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당했을 때 '도대체 나는 누구지?' 하고 자기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직위나 돈, 재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따라 삶의 가치가 결정된다. -존재의 집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생각이 맑고 공요하면 말도 맑고 고요하게 나온다. 생각이 야비하거나 거칠면 말도 또한 야비하고 거칠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말로써 그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말을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 -외로움 혼자 사는 사람들만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 누구나 자기 그림자를 따르고 살아가고 있으며, 자기 그림자를 되돌아보며 다 외롭기 마련이다. 외로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무딘 사람이다. 너무 외로움에 젖어 있어도 문제이지만 때로는 옆구리께를 스쳐가는 마른 바람 같은 거을 통해서 자기 정화, 자기 삶을 맑힐 수가 있다. 따라서 가끔은 시장기 같은 외로움을 느껴야 한다. -무소유의 삶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다.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 있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인 생활 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만족할 줄 모르고 마음이 불안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불안하고 늘 갈등 상태에서 만족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의 한 부분이다. 저마다 독립된 개체가 인다. 전제의 한 부분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의 한 부분이다. 세상이란 말과 사회란 말은 추상적인 용어이다. 구체적으로 살고 있는 개개인이 구체적인 사회이고 현실이다. 우리는 보이든 보이지 않든, 혈연이든 혈연이 아니든, 관계 속에서 서로 얽히고설켜 이루어진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이다. -지금 이순간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 '나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고 순간순간 자각하라. 한눈 팔지 말고, 딴생각하지 말고, 남의 말에 속지 말고, 스스로 살피라. 이와 같이 하는 내 말에도 얽매이지 말고 그대의 길을 가라. 이 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이런 순간들이 쌓여 한 생애를 이룬다. 너무 긴장하지 말라. 너무 긴장하면 탄력을 잃게 디고 한결같이 꾸준히 나아가기도 여렵다. 사는 일이 즐거워야 한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라. 묵은 수렁에서 거듭거듭 털고 일어서라. -행복의 비결 세상과 타협하는 일보다 더 경계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과 타협하는 일이다. 스스로 자신의 매서운 스승 노릇을 해야 한다. 우리가 일단 어딘가에 집착해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안주하면 그 웅덩이에 갇히고 만다. 그러면 마치 고여 잇는 물처럼 섞기 마련이다.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곧 자기답게 사는 것이다. 자기답게 거듭거듭 시작하며 사는 일이다. 낡은 탈로부터, 낡은 울타리로부터, 낡은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이 있는 한 나눌 것은 있다. 근원적인 마음을 나눌 때 물질적인 것은 자연히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자신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세속적인 계산법으로는 나눠 가질수록 내 잔고가 줄어들 것 같지만 출세간적인 입장에서는 나눌수록 더 풍요로워지낟.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타락하기 쉽다. 그러나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한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있다.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는 말이 있듯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은 내 안에 있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애초에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그리고 인간을 제한하는 소유물에 사로잡히면 소유의 비좁은 골방에 갇혀 정신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작은 것과 적은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청빈의 덕이다. 우주의 기운은 자력과 같아서, 우리가 일단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어두운 기운이 몰려온다고 한다. 그러나 밝은 마음을 지니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면 밝은 기운이 밀려와 우리의 삶을 밝게 비춘다. -종교적인 삶 종교적인 삶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말을 절제해야 한다. 말하고자 하는 욕마을 억제해야 한다. 말이 많은 사람은 안으로 생각하는 기능이 약하다는 증거이다. 말이 많은 사람에게 신회감이 가지 않는 것은 그이 내면이 허술하기 때문이고 또한 행동보다 말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말하기 전에 주의 깊게 생각하는 습관부턴 길러야 한다. 말하는 것보다는 귀 기울여 듣는 데 익숙해야 ㅎ나다. 말의 충동에 놀아나지 않고 안을 돌이켜 생각하면, 그 안에 지혜와 평안이 있음을 그때마다 알아차릴 것이다. 말을 아끼려면 가능한 한 타인의 일에 참견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일을 두고 아무 생각없이 무책임하게 타인에 대해서 험담을 늘어놓는 것은 바쁜 버릇이고 악덕이다.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 인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이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순간마다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 늘 변하고 있는 것이다. 날마다 똑같은 삶일 수가 엇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남을 판단할 수 없고 심판할 수가 없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비난을 하고 판단을 한다는 것은 한 달 전이나 두 달 전 또는 몇 년 전의 낡은 자로써 현재의 그 사람을 재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의 내부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비난은 늘 잘못된 것이기 일쑤다. 우리가 어떤 판다늘 내렸을 때 그는 이미 딴사람이 되어 있을 수 잇다. 말로 비난하는 버릇을 버려야 우리 안에서 사랑의 능력이 자란다. 이 사랑의 능력을 통해 생명과 행복의 싹이 움튼다. -수행의 이유 우리가 수행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닦지 않으면 때 묻기 때문이다. 마치 거울처럼, 닦아야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그 빛을 발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든 자기 자신안에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 밑바닥에서는 고독한 존재이다. 그 고독과 신비로운 세계가 하나가 되도록 안으로 살피라. 무엇이든 많이 알려 하지 말라. 책에 너무 의존하지 말라. 성인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종교적인 이론은 공허한 것이다. 진정한 앎이란 내가 직접 체험한 것, 이것만이 내 것이 될 수 있고 나를 형성한다. -생활의 규칙 '하루 한 시간은 조용히 앉아 있는 습관을 들이라. 푹신한 침대가 아닌 바닥에서 잠을 자라. 이런저런 생각 끝에 잠들지 말고 조용히 명상을 하다가 잠들도록 하라. 간소하게 먹고 간편하게 입으라, 사람들하고는 될 수 있는 한 일찍 헤어지고 자연과 가까이 하라 텔레비전과 신문을 무조건 멀리하라. 무슨 일에나 최선을 다하라. 그러나 그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풀과 벌레들처럼 언제가는 우리도 죽을 것이다, 삶다운 삶을 살아야 죽음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음을 명심하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하루 24시간이다. 이 24시간을 어떻게 나누어 쓰느가에 따라 그 인생은 얼마든지 달라진다. 바쁘고 고단한 일상이지만 하루 한 시간만이라도 조용히 앉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습관을 들인다면 하루하루의 삶에 탄력이 생길 것이다. 몸은 길들이기 나름이다. 너무 편하고 안락하면 게으름에 빠지기 쉽다. 잠들 때는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 숙면이 되도록 무심해져야 한다. 당신은 어떤 생활의 규칙을 세워 지키고 있는가. 당신을 만드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의 생활 습관이다. -혀의 여유 '문으로 들어돈 것은 집안의 보배라 생가지 말라'는 말이 있다. 바깥 소리에 팔리다 보면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바깥의 지식과 정보에 의존하면 인간 그 자체가 시들어 간다. 오늘 우리들은 어디서나 과밀 속에서 과식하고 있다. 생활의 여백이 없다. 실 實로써 가득 채우려고만 하지, 허虛의 여유를 두려고 하지 않는다. 삶은 놀라움이요, 신비이다. 인생만이 삶이 아니라 새와 꽃들, 나무와 강물, 별과 바람, 흙과 돌, 이 모두가 삶이다. 우주 전체가 조화 곧 삶이요. 생명의 신비이다. 삶은 참으로 기막히게 아름다운 것. 누가 이런 삶을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그 어떤 제도가 이 생명의 신비를 억압할 수 있단 말인가. 하루해가 자기의 할 일을 다하고 넘어가듯이 우리도 언제가는 이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맑게 갠 날만이 아름다운 노을을 남기듯이 자기 몫의 삶을 다했을 때 그 자취는 선하고 곱게 비칠 것이다. 남은 날이라도 내 자신답게 살면서, 내 저녁 노을을 장엄하게 물들이고 싶다. -빈 방에 홀로 빈 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충만하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가득 찼을 때보다도 오히려 더 충만하다. -어느 길을 갈 것인가 우리 앞에는 항상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놓여 있다. 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갖자의 삶의 양식에 따라서 오르막길을 오르는 사람도 있고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사람도 있다. 오르막길은 어렵고 힘들지만 그 길을 인간의 길이고 꼭대기에 이르는 길이다. 내리막길은 쉽고 편리하지만 그길은 짐승의 길이고 수렁으로 떨어지는 길이다. 만일 우리가 평탄한 길만 걷는다고 생각해 보라. 십 년 이십 년 한 생애를 늘 평탄한 길만 간다고 생각해 보라. 그 생이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그것은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오르막길을 통해 뭔가 뻐근한 삶의 저항 같은 것도 느끼고 창조의 의욕도 생겨나고, 새로운 삶의 의지도 지닐 수 있다. 오르막길을 통해 우리는 거듭 태어날 수 있다. 어려움을 겪지 않고는 거듭 태어날 수 없다. -침묵 인간의 혼을 울릴 수 있는 말이라면 무거운 침묵이 배경이 되어야 한다. 침묵은 모든 삼라만사의 기본적인 존재 양식이다. 나무든 짐승이든 사람이든 그 배경엔 늘 침묵이 있다. 침묵을 바탕으로 해서 거기서 움이 트고 잎이 피고 꽃과 열매가 맺는다. 우리는 안에 있는 것을 늘 밖에서 찾으려고 한다. 침묵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에 고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늘 내 안에 들어 있다. 따라서 밖으로 쳐다보려만 해서는 안 된다. 안으로 들여다보는 데서 침묵을 캐낼 수가 없다. 침묵은 자기 정화의 지름길이다. 온갖 소음으로부터 우리 영혼을 지키려면 침묵의 의미를 몸에 익혀야 한다. -달빛 요즘 자다가 몇 차례씩 깬다. 달빛이 방 안에까지 휜히 스며들어 자주 눈을 뜬다. 내방 안에 들어온 소님을 모른 체할 수 없어 자링서 일어나 마주 앉는다. 한낮의 좌정보다 자다가 깬 한밤중의 이 좌정을 나는 즐기고자 한다.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지 않으니 잠들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소식으로 받아들이면 맑은 정신이 든다. 중천에 떠 있는 달처럼 내둘레를 두루두루 비춰 주고 싶다. -하루 한 생각 1 나의 인생은 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의 연소. 때문에 모방과 추종을 떠나 내 나름의 삶을 이루어야 한다. 흐린 곳에 살면서도 물들지 않고 항상 둘레를 환히 비추는 연꽃처럼. 2 여행길에 오르면 자기 영혼의 무게를 느낀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며 살아왔는지, 자신의 속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다. 여행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자기 정리의 엄숙한 도정이요, 생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하직하는 연습이기도 하다. 3 가끔은 자기가 살던 집을 떠나볼 일이다. 자신의 삶을 마치고 떠나간 후의 그런자리가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예행연습을 통해 하찮은 일상의 집착에서 얼마쯤은 벗어나게 될 것이다. 4 개체의 삶은 어떤 비약을 거쳐 근원적인 전체의 삶에 도달해야 한다. 비약을 거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다. 근원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는 영원한 방랑자로 처지고 만다. 5 홀로 여행자가 되면 투명하고 순순해진다. 낮선 환경에 놓여 있을 때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눈을 뜬다. 자기 모습이 뚜렷이 드러난다. 개체가 된다는 것은 곧 자유로워지는 것, 그리고 온전한 휴식을 누릴 수 있다. 6 사심없는 무심한 마음은 그러한 마음끼리 서로 통한다. 새와 나무가 서로 믿고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것도 그 마음에 때가 끼어 있지 않아서다. 7 사람은 누구에겐가 의존하려는 습관이 있다. 부처라 할지라도 그는 타인, 불교는 부처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르침에 따라 자기 자신답게 사는 길이다. 그러므로 불교란 부처의 가르침일 뿐 아니라 나 자신이 부처가 되는 자기 실현의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의지할 것은 부처가 아니라 나 자신과 진리뿐. 불교는 이와 같이 자기 탐구의 종교이다. 8 생명은 늘 새롭다. 생명은 늘 흐르는 강물처럼 새롭다. 그런데 틀에 갇히면, 늪에 갇히면, 그것이 상하고 만다. 거듭거듭 둘레를 에워싼 제방을 무너뜨리고 늘 흐르는 쪽으로 살아야 한다. 9 삶은 놀라울 만큼 깊고 넓은 그 무엇이다. 하나의 위대한 신비이고 우리들의 생명이 그 안에 움직익 있는 거대한 나라이다. 문제는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사는가에 있지 않고, 자기 몫의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10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으라. 그 일에 전심전력을 기울여라. 그래서 당신의 인생을 환하게 꽃피우라. 11 새 옷으로 갈아입으려면 먼저 낡은 옷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낡은 옷을 벗어 버리지 않고는 새 옷을 입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길고 소통하려면 그 어떤 길에도 매여 있지 말아야 한다. 12 가치 있는 삶이란 욕망을 채우는 삶이 아니라 의미를 채우는 삶이다. 내게 허락된 인생이, 내 삶의 잔고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스스로 확인하는 삶이다. 13 말은 침묵에서 나와야 한다.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은 말은 소음과 다를 게 없다. 인간은 침묵 속에서만 사물을 깊이 통찰할 수 있고 또한 자기 존재를 자각한다. 이때 비로소 자기 언어를 갖게 된다. 외부의 소음으로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모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비극이다. 14 투명한 사람끼리는 말이 없어도 즐겁다. 소리를 입 박에 내지 않을 뿐 무수한 말이 침묵 속에서 오간다. 말수가 적은 사람들의 말은 무게를 가지고 우리 영혼 안에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오래오래 울린다. 15 보지 않아도 될 것은 보지 말고 듣지 않아도 될 소리는 듣지 말고 먹지 않아도 될 음식은 먹지 말고 읽지 않아도 될 글은 읽지 말아야 한다. 될수 있는 한 적게 보고, 적게 갖고, 적게 만나고, 적게 말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16 자기 자신답게 살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이다. 17 사람들은 하나같이 얻는 것을 좋아하고 잃는 것은 싫어한다. 그러나 전 생애의 과정을 통해 어떤 것이 참으로 얻는 것이고 잃는 것인지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잃지 않고는 얻을 수가 없다. 전체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무無가 되어야 한다. 자기중심적 개체의 삶에서 자타를 넘어선 전체의 삶으로 탈바꿈이 되지 않고는 거듭나기 어렵다. 18 나는 독립된 외톨이가 아니라 머릿 속의 하나이다. 관계된 세계가 없으면 내 존재는 무의미하다. 내가 돋 흙이고, 물이고, 공기이고, 지구이다. 내 자신이 곧 인류이고 우주이다.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고 많은 것 속에 하나가 있으니 하나가 곧 모든 것이고 많은 그것이 곧 하나를 이룬다. 19 침묵과 고요와 몰입을 통해서 마음속에 뿌리내려 있는 가장 곱고 향기로운 연꽃이 피어난다. 20 우리가 산다는 것은 이 우주가 벌이고 있는 생명의 잔치에 함께하는 일이다. 사람이 착하고 어진 마음을 쓰면 이 우주에 있는 착하고 어진 기운들이 따라온다. 반대로 어둡거나 어리석은 생각을 지닐때는 이 우주 안에 어둡고 파괴적인 요소들이 몰려온다. 21 참다운 스승은 입 벌려 가르치지 않지만, 지혜로운 제자들은 그의 곁에서 늘 새롭게 배운다. 스승은 제자가 스스로 깨닫도록 일과 성의를 다해서 거들고 돕는다. 제자 내부의 본질이 스스로 꽃피어나도록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여 도울 뿐이다. 22 가슴은 존재의 핵심이고 중심이다. 가슴은 모든 것의 중심이다. 가슴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 생명의 신비인 사랑도, 다정한 눈빛도, 가슴에서 싹튼다. 23 눈뜬 사람들의 가르침은 자기로부터 시작하라고 했지 자기 자신에게서 그치라고 하지 않았다. 자기를 인식하되 거기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 자기에게서 시작해 세상에 도달해야 한다. 궁극적인 관심은 세상에 있어야 한다. 24 순간순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 살아 있는 사람이다. 낡은 것으로부터 묵은 것으로부터 비본질적인 것으로부터 거듭거듭 털고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 25 침묵 속에서 사람은 거듭거듭 형성되어 간다. 침묵의 바다에 잠김으로써 자신의 실체를 응시할 수 있고 시든 생명의 뜰을 소생시킬 수 있다. 26 인간은 늘 근원적인 물음 앞에 마주서야 한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그런 물음과 대면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없다. 항상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고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물을 수 있어야 한다. 27 지혜로운 사람은 움켜주기보다 쓰다듬기를, 곧장 달려가기보다는 구불구불 돌아가기를 좋아한다. 문명은 직선이고 자연은 곡선이다. 곡선에는 조화와 균형, 삶의 비밀이 담겨 있다. 이것을 익히는 것이 삶의 기술이다. 시간을 즐기는 사람은 영혼의 밭을 가는 사람이다. 28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가는 것이지 졀코 오는 것이 아니다. 한번 흘러보내고 나면 다시 찾을 수 없다. 눈이 맑을 때 실컷 배워 두라. 젊음이 머무는 동안 괴로워하며 탐구하라. 29 순간순간, 하루하루를 우리가 어떻게 말라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우리 삶은 달라진다. 맑은 생활과 어두운 생활의 갈림길이 현재 우리들 자신의 밝음과 어둠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30 깨어 있는 영혼에는 세월이 스며들지 못한다. 세월이 비켜간다. 깨어 있는 영혼은 순간순간 살아 있기 때문이다. 31 우리 곁에서 꽃이 피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생명의 신비인가. 곱고 향기로운 우주가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잡잠하던 숲에서 새들이 맑은 목청으로 노래하는 것은 우리들 삶에 물기를 보태주는 가락이다. 이런 일들이 내게는 그 어떤 정치나 경제 현상보다 훨씬 절실한 삶의 보람으로 여겨진다. 새벽 달빛 아래서 매화 향기에 귀를 기울리고 있으면 내 안에서도 은은히 삶의 향기가 배어 나오는 듯하다. 52 내가 외떨어져 살기를 좋아하는 것은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리듬에 맞추어 내 길을 가기 위해서다. 그리고 사람보다 나무들이 좋아서일 것이다. 홀로 있어도 의연한 나무들이 내 삶을 곁엣 지켜보고 거들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33 나의 취미는 끝없는, 끝없는 인내다 -좋은 말 우리는 좋은 말을 듣기 위해 바쁜 일상을 쪼개어 여기저기 찾아다닌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번번이 실망한다. 그 좋은 말이란 무엇인가? 또 어디에 좋은 말이 있는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 좋은 말을 듣고자 하는가? 아무리 좋은 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내 자신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 어떤 좋은 말도 내게는 무의미하고 무익하다. 좋은 말은, 좋은 가르침은 사람의 입을 거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주 만물이 내 순간 그때 그곳에서 좋은 가르침을 펼쳐 보이고 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얼마나 많는 좋은 말을 들어 왔는가. 지금까지 들은 좋은 말만 가지고도 누구나 성인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말이란 그렇게 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의 삶에 이어지지 않으면 말이란 공허하다. 자기 체험이 없는 말에 울림이 없듯이 그 어떤 가르침도 삶으로 구체화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깨어 있고자 하는 사람은 바로 그 순간을 살아야 한다. 좋은 말은 어디에 있는가? 그대가 서 있는 바로 지금 그곳에서 자기 자신답게 살고 있다면 그 자리에 좋은 말이 살아 숨쉰다. 오타가 수두룩 합니다. 양해하여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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