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노트/마음의 뜨락

법정 잠언집

시리이 2006. 6. 13. 12:59

    날마다 행복하소서!

    모든 인간의 삶에 깊은 영혼의 울림을 주는 화두와 같은 잠언들 스크랩 금지하였으니 올려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혹시 안된다면 글 비공개로 하겠습니다. 양해하여 주시면 하는 바램도 있답니다. 빈 마음입니다.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그리운 사람 우리가 진정으로 만나야 할 사람은 그리운 사람이다. 곁에 있으나 떨어져 있으나 그리움의 물결이 출렁거리는 그런 사람과는 때때로 만나야 한다. 그리워하면서도 만날 수 없으면 삶에 그늘이 진다. 그리움이 따르지 않는 만남은 지극히 사무적인 마주침이거나 일상적인 스치고 지나감이다. 마주 침과 스치고 지나감에는 영혼의 울림이 없다. 영혼의 울림이 없으면 만나도 만난 것이 아니다. -단 한 번 만나는 인연 차茶의 세계에 일기일회一期一會란 말이 있다. 일생에 단 한 번 만나는 인연이란 뜻이다. 개인의 생애로 볼 때도 이 사람과 이 한때를 갖는 이것이 생애에서 단 한번의 기회라고 여긴다면 순간순간을 뜻 깊게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몇 번이고 만날 수 있다면 범속해지기 쉽지만, 이것이 처음이면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때 아무렇게나 스치고 지나칠 수 없다. 기회란 늘 있는 것이 아니다. 한번 놓치면 다시 돌이키기 어렵다. -소유지족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빈손을 왔으니 가난한들 무슨 손해가 있으며, 죽을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으니 부유한들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할 수 있으면 얻는 것보다 덜 써야 한다. 절약하지 않으면 가득 차 있어도 반드시 고갈되고, 절약하면 텅 비어 있어도 언제가는 차게 된다. 덜 갖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덜 갖고도 얼마든지 더 많이 존재할 있다. 소유와 소비 지향적인 삶의 방식에서 존재 지향적인 생활 태도로 바뀌어야 한다. 소유 지향적인 삶과 존재 지향적인 삶은 우리들 일상에 두루 깔려 있다. 거기에는 그 나름의 살아가는 기쁨이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 이르렀을 때 어느 쪽 삶이 우리가 기대어 살아갈 만한 삶이며.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삶인가 뚜렷이 드러난다. 똑같은 조건을 두고 한쪽에서는 삶의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근심 걱정의 원인으로 본다. 소유지족 小欲知足.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크고 많은 것에서보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있다. 크고 많은 것만을 원하면 그 욕망을 채울 길이 없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삶의 향기인 아름다움과 고마움이 스며 있다. -빈 마음 등잔에 기름을 가득 채웠더니 심지를 줄여도 자꾸만 불꽃이 올라와 펄럭거린다. 가득 찬 것은 덜 찬 것만 못하다는 교훈을 눈앞에서 배우고 있다. 빈 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 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 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 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린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차다. -귀 기울여 듣는다는 것 귀 기울여 듣는다는 것은 침묵을 익힌다는 말이다. 침묵은 자기 내면의 바다이다. 진실한 말은 내면의 바다에서 자란다. 자신만의 언어를 갖지 못하고 남의 말만 열심히 흉내 내는 오늘의 우리는 무엇인가. 듣는다는 것은 바깥 것을 매개로 자기 안에 잠들어 있는 소리를 깨우는 일이다. 귀 기울여 들을 줄 아는 사람은 그말에서 자기 존재를 발견한다. 그러나 자기 말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기 일쑤다. 이런 구절이 있다. '별들이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남한테 전하려면 그것에 필요한 말이 우리 안에서 먼저 자라야 한다.' 말이 되기까지는 우리들 안에서 씨앗처럼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듣는다는 것은 자기 것을 비우기 위해 침묵을 익히는 기간이다. -나무 꺽이는 소리 산에 살아 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겨울철이면 나무들이 많이 꺽인다.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 않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럽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 덮이면 꺽이게 된다. 가지 끝에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그 가볍고 하얀 눈에 꺽이고 마는 것이다. 깊은 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무들이 꺽이는 저 골짝에서 나무들이 꺽이는 메아리가 울려올 때 나는 잠을 이룰 수 없다.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 앞에서 넘어지는 그 의미 때문일까. 산은 한겨울이 지나면 앓고 난 얼굴처럼 수척하다. -무학 인간의 탈을 쓴 인형은 많아도 인간다운 인간이 적은 현실 앞에서 지식인이 할 일은 무엇인가. 무기력하고 나약하기만 한 그 인혀의 집에서 나오지 않고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무학 無學이란 말이 있다. 전혀 배움이 없거나 배우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많이 배웠으면서도 배운 자취가 없음을 가리킴이다. 학문이나 지식을 코에 걸지 말고 지식 과잉에서 오는 관념을 경졔하라는 뜻이다. 지식이나 정보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롭고 생기 넘치는 삶이 소중하다는 말이다. 지식이 인격과 단절될 때 그 지식인은 가짜요, 위선자이다. 우리는 인형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다. 우리는 끌려가는 짐승이 아니라 신념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야 할 인간이다. -누구와 함께 나는 이 산중에서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하는가. 스스로 물어본다. 사람은 나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므로 사람과 자리를 같이할 일은 없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과 힌 구름, 시냇물은 산을 이루고 있는 배경이므로 자리를 같이하고 안 하고 문제가 아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피부로 느끼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누고와 함께 자리를 같이 할 것인가. 살아 있는 것들은 끼리끼리 어울린다. 그러니 자리를 같이하는 그 상대가 자신의 한 분신임을 알아야 한다. 그대는 누구와 함께 자리를 같이하는가. -다 행복하라 며칠동안 펑펑 눈이 쏟아져 길이 막힐 때 오도 가도 못하고 혼자서 적막강산에 갇혀 있을 때 나는 새삼스럽게 홀로 살아 있음을 누리면서 순순한 내 자신이 되어 둘레의 사물과 일체감을 나눈다. 그리고 눈이 멎어 달이 그 얼굴을 내보일 때 월백 설백 천지백 月白雪白天地白의 그 황홀한 경계에 나는 숨을 죽인다. 살아 있는 모든 이웃들이 다 행복하라. 태평하라. 안락하라. -소유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소유를 당하는 것이며,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무엇인가를 가질 때 우리의 정신은 그만큼 부자유해지며 타인에게 시기심과 질투와 대립을 불러일으킨다. 적게 가질수록 더욱 사랑할 수 있다. 어느 날인가는 적게 가진 그것마저도, 다 버리고 갈 우리 처지가 아닌가. 소유한 것을 버리고 모든 속박에서 그대 자신을 해방시키라. 그리고 존재하라. 인간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 다른 의미이다. 소유물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는 이상으로 우리 자신을 소유해 버린다. 그러므로 필요에 따라 살아야지 욕망에 따라 살지 말아야 한다. 욕망과 필요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바람은 왜 부는가 바람은 왜 부는가. 어디서 와서 또 어디로 가는가. 기압의 변화로 인해서 일어나는 대기의 흐름인 바람은 움직임으로써 살아 있는 기능을 한다. 움직임이 없으면 그건 바람일 수 없다. 움직이는 것이 어디 바람뿐이겠는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그 나름으로 움직이고 흐른다. 강물이 흐르고 바다가 출렁이는 것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묵묵히 서 있는 나무들도 움직이면서 안으로 끊임없이 수액을 돌게 한다. 해가 뜨고 지는 거나 달이 찼다가 기우는 것도, 해와 달이 살아 있어 그런 작용을 한다. 우주의 호흡과 같은 이런 움직임과 흐름이 없다면 인간 또한 살아갈 수 없다. 이 세상에서 멈추거나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멈춤과 조정됨은 곧 죽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살아 있고자 한다면 그 움직임과 흐름을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것은 변화를 거치면서 살아 움직인다. 하나의 극에서 다른 극으로 움직이면서 변화한다. 이런 변화와 움직임을 통해 새롭고 신선한 삶을 이룰 수 있다. -인간의 봄 얼어붙은 대지에 다시 봄이 움트고 있다. 겨울 동안 죽은 듯 잠잠하던 숲이 새소리에 실려 조금씩 깨어나고 있다. 우리들 안에서도 새로운 봄이 움틀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미루는 버릇과 일상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그 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한다. 인간의 봄은 어디서 오는가? 묵은 버릇을 떨쳐 버리고 새롭게 시작할 때 새 움이 튼다. -마음이 바탕 사람 마음의 바탕은 선도 악도 아니다. 선과 악은 인연에 따라 일어날 뿐. 선한 인연을 만나면 마음이 선해지고 나쁜 인연을 만나면 마음이 약해진다. 안개 속에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옷이 젖듯이. -흙 가까이 서산에 해 기울어 산그늘이 내릴 무렵. 훨훨 벗어부치고 맨발로 채소밭에 들어가 김 매는 일이 요즘 오두막의 해질녘 일과이다. 맨발로 밭흙을 밟는 그 감촉을 무엇에 비기랴. 흙을 가까이하는 것은 살아 있는 우주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흙을 가까이하라. 흙에서 생명의 싹이 움튼다. 흙을 가까이하라. 나약하고 관념적인 도시의 사막에서 벗어날 수 있다. 흙을 가까이해야 삶의 뿌리를 든든한 대지에 내릴 수 있다. 우리에게 대지는 영원한 모성. 흙에서 음식물을 길러 내고 그 위에다 집을 짓는다. 그 위를 직립 보행하다가 살다가 마침내는 그 흙에 누워 삭아지고 마는 것이 우리들 삶의 방식이다. 흙은 우리들 생명의 젖줄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씨앗을 뿌리면 움이 트고 잎과 가지가 펼쳐져 거기 꽃과 열매가 맺힌다. 생명의 발아 현상을 통해 불가시적인 영역에도 눈을 뜨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흙을 가까이하면 흙의 덕을 배워 순박하고 겸허해지면 민도 기다릴 줄을 안다. 흙에는 거짓이 없고, 추월과 무질서도 없다. 시멘트와 철근과 아스팔트에서는 생명이 움틀 수 없다. 비가 내리는 자연의 소리마저 도시는 거부한다. 그러나 흙은 비를, 그 소리를 받아들인다. 흙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인간의 마음은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정결해지고 평온해진다. 어디 그뿐인가. 구두와 양말을 벗어 버리고 일구어 놓은 밭흙을 맨발로 감촉해 보라. 그리고 흙냄새를 맡아 보라. 그것은 순수한 생의 기쁨이 될 것이다. -긍정으로 향하는 부정 인정이 많으면 도심道心이 성글다는 옛 선사들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집착은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든다. 해탈이란 온갖 얽힘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자제의 경지를 말한다. 그런데 그 얽힘의 원인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집착에 있다. 물건에 대한 집착보다도 인정에 대한 집착은 몇 곱절 더 질기다. 출가는 그러한 집착의 집에서 떠남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출가한 수행자들은 어느 면으로보면 비정하리만큼 금속성에 가깝다. 그러나 그러한 냉기는 어디까지나 긍정의 열기로 향하는 부정의 단계이다. 긍정의 지평에 선 보살의 자비는 봄볕처럼 따사롭다. -산 산을 건성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산은 그저 산일 뿐이다. 그러나 마음을 활짝 열고 산을 진정으로 바라보면 우리 자신도 문득 산이 된다. 내가 정신없이 분주하게 살 때에는 저만치서 산이 나를 보고 있지만 내 마음이 그윽하고 한가할 때는 내가 산을 바라본다. -다시 길 떠나며 이 봄에 나는 또 길을 찾아 나서야겠다. 이곳에 옮겨 와 살 만큼 살았으니 이제는 새로운 자리로 옮겨 볼 생각이다. 수행자가 한 곳에 오래 머물면 안일과 타성의 늪에 갇혀 시들게 된다. 다시 또 서툴게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영원한 아마추어로서 새 길을 가고 싶다. 묵은 것을 버리지 않고는 새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미 알려진 것들에서 자유로워져야 새로운 것을 찾아낼 수 있다. 내 자신만이 내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 그 누구도 내 삶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나는 보다 더 단순하고 소박하게. 그리고 없는 듯이 살고 싶다. 나는 아무것도, 그 어떤 사람도 되고 싶지 않다. 그저 나 자신이고 싶다. 나는 내 삶을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안고, 그 누구도 닮지 안흥면서 내 식대로 살고자 한다. 자기 식대로 살려면 투철한 개인의 질서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 질서에는 게으르지 않음과 검소함과 단순함과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음도 포함된다. 그리고 때로는 높이높이 솟아오르고 때로는 깊이깊이 잠기는 그같은 삶의 리듬도 뒤따라야 한다. -존재 지향적인 삶 삶을 마치 소유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소멸을 두려워한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하낟.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내일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이미 오늘을 제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오늘을 마음껏 살고 있다면 내일의 걱정 근심을 가불해 쓸 이유가 어디 있는가. 죽음 두려우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생에 집착하고 삶을 소유로 여기기 때문이다. 생에 대한 집착과 소유의 관념에서 놓여날 수 있다면 엄연한 우주 질서 앞에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는 것이므로. 물소리에 귀를 모으라. 그것은 우주의 맥박이고 세월이 흘러가는 소리다. 우리가 살 만큼 살다가 갈 곳이 어디인가를 깨우쳐 주는 소리 없는 소리다. -가을은 이상한 계절 가을은 참 이상한 계절이다. 조금 차분해진 마음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볼 때, 푸른 하늘 아래서 시름시름 앓고 잇는 나무들을 바라볼 때, 산다는 게 뭘까 하고 문득 혼자서 중얼거릴 때, 나는 새삼스레 착해지려고 한다. 나뭇잎처럼 우리들의 마음도 엷은 웃에 물들어 간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의 대중가요에도,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그런 가사 하나에도 곧잘 귀를 모은다.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멀리 떠나 있는 사람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깊은 밤 등불 아래서 주소록을 펼쳐 들고 친구들의 눈매를, 그 음성을 기억해 낸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한낮에는 아무리 의젖하고 뻣뻣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해가 기운 다음에는 가랑잎 구르는 소리 하나에, 귀뚜라미 우는 소리 하나에도 마음을 여는 연약한 존재임을 새삼스레 알아차린다. 만나는 사람마다 따뜻한 눈길을 보내 주고 싶다. 한 사람 한 사람 그 얼굴을 익혀 두고 싶다. 이 다음 세상 어느 길목에선가 우연히 서로 마주칠 때, 오, 아무개 아닌가 하고 정답게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도록 지금 이 자리에서 익혀 두고 싶다. 이 가을에 나는 모든 이웃들을 사랑해 주고 싶다. 단 한사람이라도 서운하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가을은 정말 이상한 계절이다. -나무처럼 새싹을 틔우고 잎을 펼치고 열매를 맺고 그러다가 때가 오면 훨훨 벗어 버리고 빈 몸으로 겨울 하늘 아래 당당하게 서 있는 나무 새들이 날아와 팔이나 품에 안겨도 그저 무심할 수 있고, 폭풍우가 휘몰아쳐 가지 하나쯤 꺾여도, 끄덕없는 요지부동. 곁에서 꽃을 피우는 꽃나무가 있어 나비와 벌들이 찾아가는 것을 볼지라도 시샘할 줄 모르는 의연하고 담담한 나무. 한여름이면 발치에 서늘한 그늘을 드리워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쉬어 가게 하면서도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덕을 지니 나무......, 나무처럼 살 수 잇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저것 복잡한 분별없이 단순하고 담백하고 무심히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산에 사는 산사람 1 우리가 산을 찾는 것은 산이 거기 그렇게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산에 푸른 젊음이 있어 우리에게 손짓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 묻지 않은 사람과 때 묻지 않은 자연이 커다란 조화를 이루면서 끝없는 생명의 빛을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고 싶다. 그런 산에 돌아가 살고 싶다. 2 우리처럼 한평생 산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ㅇ게 산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다. 산은 곧 커다란 생명체요. 시들지 않는 영원한 품속이다. 산에는 곷이 피고 꽃이 지는 일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시가 있고 음악이 있고, 사상이 있고, 종교가 있다. 인류의 위대한 사상이나 종교가 벽돌과 시멘트로 된 교실에서가 아니라, 때 묻지 않은 자연의 숲 속에서 움텄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3 산에서 사는 사람들이 산에 대한 향수를 지닌고 있다면 속 모르는 남들은 웃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산승들은 누구보다도 산으로 내닫는 진한 향수를 지니다. 산에는 높이 솟은 봉우리만 아니라 깊은 골짜기도 있다. 나무와 바위와 시냇물과 온갖 새들이며 짐승, 안개, 구름, 바람, 산울림, 이밖에도 무수한 것들이 하나에 어울려 하나의 산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산은 사계절을 두고 늘 새롭다. 그 중에도 여름이 지나간 가을철 산은 영원한 나그네인 우리들을 설레게 한다. 4 인적이 미치지 않는 심산에서는 겨울이 필요없다. 둘레의 모든 것이 내 얼굴이요. 모습일 테니까. 달력도 필요 없다. 시간 밖에서 살 테니까. 혼자이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얽어매지 못할 것이다. 홀로 있다는 것은 순수한 내가 있는 것. 자유는 홀로 있음을 뜻한다. -큰 거울 평등한 성품에는 나와 남이 없고 큰 거울에는 멀고 가까움이 없다. 그 평등한 성품과 큰 거울은 어딩세서 찾아야 할 것인가. 남의 말에 귀 기울이거나 밖으로 헛눈 팔지 않고, 자기 자신을 투철히 관찰할 때 평등한 성품과 그 큰 거울은 저절로 드러난다. -명상에 이르는 길 1 사람의 마음은 그 어디에도 얽매임 없이 순수하게 집중하고 몰입할 때 저절로 평온해지고 맑고 투명해진다. 먹고, 마시고 , 놀고, 자고, 배우고, 익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명상은 우리들 삶의 일부분이다. 명상은 안팎으로 지켜보는 일이다.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와 언어와 동작, 생활 습관들을 낱낱이 지켜보는 일이다. 흘러가는 강물을 강둑 위에서 묵묵히 바라보듯이 그저 지켜볼 뿐이다. 명상은 소리없는 음악과 같다. 그것ㅇ는 관찰자가 사라진 커다란 침묵이다. 그리고 명상은 늘 새롭다. 명상은 연속성을 갖지 않기 때문에 지나가 버린 세월이 끼어들 수 없다. 같은 초이면서도 새로 켠 촛불은 그 전의 촛불이 아닌 것처럼 어제 했던 명상은 오늘의 명상과 같지 않다. 명상은 흐르는 강물처럼 늘 새롭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침묵 속에 묻고 또 물어야 한ㄷ.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 때때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없다면 마음은 황무지가 되고 말 것이다. 명상하라, 그 힘으로 삶을 다지라. 2 명상은 마음을 열고 귀 기울이고 바라봄이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들끊는 번뇌를 내려놓고, 빛과 소리에 무심히 마음을 열고 있으면 잔잔한 평안과 기쁨이 그 안에 있다. 깨달음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곷피어남이다. 지적 호기심의 차원에서 벗어나 영적 탐구의 차원으로 심화됨이 없다면 깨달음은 결코 꽃피어나지 않는다. 진정한 앎은 말 이전의 침묵에서 그 움이 튼다. 밖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라. 만물이 살아서 움트는 이 봄철에 저마다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일이다. 그 귀 기울임에서 새로운 삶을 열어야 한다. -있을 자리 산중에 있는 어떤 절에 갔더니 한 스님 방에 이름 있는 화가의 산수화가 걸려 있었다. 아주 뛰어난 그림이었다. 그러나 주인과 벽을 잘못 만나 그 그림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연 산수가 있는 산중이기 때문에 그 산수를 모방한 그림이 기를 펴지 못한 것이다. 그런 산수화는 자연과 떨어진 도시에 있어야 어울리고 그런 곳에서만 빛을 발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있을 자리에 있어야 살아서 숨쉰다. -살 때와 죽을 때 살 때는 삶에 철저해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 죽을 때는 죽음 철저해 그 전부가 죽어야 한다. 삶에 철저할 때는 털끝만치도 죽음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또한 일단 죽게 되면 조금도 삶에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된다. 죽음 또한 내 자신의 일이니 살 대는 철저히 살고 죽을 때 또한 철저히 죽을 수 있어야 한다. 꽃은 필 때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질 때도 아름다워야 한다. 모란처럼 뚝뚝 무너져 내릴 수 있는게 얼마나 산뜻한 낙화인가. 새잎이 파랗게 돋아나도록 질 줄 모르고 매달려 있는 꽃은 필 때만큼 아름답지가 않다. 생과 사를 물을 것 없이 그때그때의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것이 불교의 생사관이다. 우리가 순간순간 산다는 것은 한편으론 순간순간 죽어 간다는 소식이다. 현자는 삶에 대해서 생각하지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지켜보라. 허리를 꼿꼿이 펴고 조용히 앉아 끝없이 움직이는 생각을. 그 생각을 없애려고 하지도 말라. 그것은 또 다른 생각이고 망상일 뿐 그저 지켜보기만 하라. 지켜보는 사람은 언덕 위에서 골짜기를 내려다보듯 그 대상으로부터 초월해 있다. 지켜보는 동안은 이렇다 저렇다 조금도 판단하지 말라. 강물이 흘러가듯 그렇게 지켜보라. 그리고 받아들이라. 어느 것 하나 거역하지 말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라. 그받아들임 안에서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본래의 자기 자신과 마주하라. -그는 누구인가 1 내 두에서 언제나 나를 지켜보는 눈이 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아득한 세월을 두고 밤이나 낮이나 나를 낱낱이 지켜보는 눈이 있다. 그는 누구인가? 언어의 틀에 갇히지 말고, 그가 누구인지 깊이깊이 살펴보라. 나를 지켜보는 그와 떨어져 있지 말고 그와 하나가 되라. 그러면 삶이 매 순간 새로워질 것이다. 2 무심코 하는 말이든 뜻을 담은 말이든 듣는 귀가 바로 곁에 있다. 그것을 신이라 이름 붙일 수도 있고, 영혼이라 부를 수도 있고, 불성이라 할 수 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은 곧 그 사람의 속뜰을 열어 보임이다. 그의 말을 통해 겹겹으로 닫힌 그의 내면 세계를 알 수 있다. 일상에 때 묻고 닮은 자기 자신을 그 어느 때 그 무엇으로 회복할 것인가. 입 다물고 귀 기울이는 습관을 익히라. -녹은 그 쇠를 먹는다 법구경에는 이런 비유가 있다.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점점 그 쇠를 먹는다.' 이와 같이 마음이 그늘지면 그 사람 자신이 녹슬고 만다. 온전한 인간이 되려면 내 마음을 내가 쓸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고 일상적인 인간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왜 우리가 같은 배를 타고 같은 방향으로 항해하는 여행자들이 아닌가. -연잎의 지혜 빗방울이 연잎에 고이면 연잎은 한동안 물방울의 유동으로 일렁이다가 어느 만큼 고이면 수정처럼 투명한 물을 미련 없이 쏟아 버린다. 그 물이 아래 연잎에 떨어지면 거기에서 또 일렁이다가 도르르 연못으로 비워 버린다. 이런 광경을 무심히 지켜보면서.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무게만을 싣고 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비워 버리는구나'하고 그 지혜에 감탄했었다. 그렇지 않고 욕심대로 받아들이면 마침내 잎이 찢기거나 줄기가 꺽익 말 것이다. 세상 사는 이치도 이와 마찬가지다. -꽃에게서 배우라 풀과 나무들은 저마다 자기다운 꽃을 피우고 있다. 그 누구도 닮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 풀이 지닌 특성과 그 나무가 지닌 특성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눈부신 조화를 이루고 있다. 풀과 나무들은 있는 그대로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생명의 신비를 꽃피운다.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자신들의 분수에 맞도록 열어 보인다. 옛 스승 임제 선사는 말한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그러면 그가 서 있는 자리마다 향기로운 곷이 피어나리라.'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불행해진다. 진달래는 진달래답게 피면 되고, 민들레는 민들레답게 피면 된다. 남과 비교하면 불행해진다. 이런 도리를 이 봄철에 꽃에게서 배우라. 아름다운의 본질에 대해 옛 스승은 다시 말한다. '일 없는 사람이 귀한 사람이다. 다만 억지로 꾸미지 말라. 있는 그대로가 좋다.' '일 없는 사람'은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이 아니다.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그 일에 빠져 들지 않는 사람, 일에 눈멀지 않고 그 일을 통해 자유로워진 사람을 말한다. 억지로 꾸미려 하지 말라. 아름다움이란 꾸며서 되는 것이 아니다. 본래 모습 그대로가 그만이 지닌 특성의 아름다움이다. -먹의 세계 단순함이란 그림으로 치면 수묵화의 경지이다. 먹으로 그린 수묵화. 이 빛깔 저 빛깔 다 써보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먹으로 하지 않는가. 그 먹은 한가지 빛이 아니다. 그속에는 모든 빛이 다 갖춰져 있다. 또 다른 명상적인 표현으로 말하면 그것은 침묵의 세계이다. 텅 빈 공의 세계이다. -삶에는 즐거움이 따라야 한다. 삶에는 즐거움이 따라야 한다. 즐거움이 없으면 그곳에는 삶이 정착되지 않는다. 즐거움은 밖에서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인생관을 지니고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일상적인 사소한 일을 거치면서 고마움과 기쁨을 누릴 줄 알아야 한다. 부분적인 자기가 아니라 전체적인 자기일 때, 순간순간 생기와 탄려과 삶의 건강함이 배어 나온다. 여기 비로소 홀로 사는 즐거움이 움튼다. -창을 바르며 어제는 창을 발랐다. 바람기 없는 날 혼자서 창을 바르고 있으면 내 마음은 티 하나 없이 맑고 투명하다. 무심의 경지가 어떻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새로 바른 창에 맑은 햇살이 비치니 방 안이 한결 정갈하게 보인다. 가을날 오후의 한때, 빈 방에 홀로 앉아 새로 바른 창호에 비치는 맑고 포근한 햇살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아주 넉넉하다. 이런 맑고 투명한 삶의 여백으로 인해 나는 새삼스레 행복해지려고 한다. -스스로 행복한 사람 현대인의 불행은 보자람이 아니라 오히려 넘침에 있다. 모자람이 채워지면 고마움과 만족함을 알지만 넘침에는 고마움과 만족이 따르지 않는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가진 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을 잃어 가기 때문이다. 따뜻한 가슴을 잃지 않으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 등 살아있는 생물과도 교감할 줄 알아야 한다. 석창포와 자금우 화분을 햇빛을 따라 옮겨 주고 물뿌리개로 물을 뿌려 주면서 그 잎과 열매에 눈길을 주고 있으면 내 가슴이 따뜻해진다. 한밤중 이따금 기침을 하면서 깨어난다. 창문에 달빛이 환하게 비치는 것을 보고 창문을 열었을 때 달도 희고 눈도 희고 온 천지가 힌 것을 보면 내 가슴 또한 따뜻해진다.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 잇다는 사실에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영원한 존재는 그 누구에게도, 그 어디에도 없다. 모두가 한때일 뿐이다. 살아 있을 때 다른 존재들과 따뜻한 가슴을 나누어야 한다. 자기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그러므로 행복과 불행은 박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고 찾는 것이다. 행복은 이웃과 함께 누려야 하고 불행은 딛고 일어서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행복해야 한다. -인연과 만남 만남은 시절 인연이 와야 이루어진다고 선가에서는 말한다. 그 이전에 만날 수 있는 씨앗이나 요인은 다 갖추어져 있었지만 시절이 맞지 않으면 만나지 못한다. 만날 수 있는 잠재력이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가 시절 인연이 와서 비로소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만남이란 일종의 자기 분신을 만나는 것이다. 종교적인 생각이나 빛깔을 넘어서 마음과 마음이 접촉될 때 하나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우주 자체가 하나의 마음이다. 마음이 열리면 사람과 세상과의 진저한 만남이 이루어지낟. =마음의 주인이 되라 내마음을 내 뜻대로 할 수 있다면 나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한도인(閒道人이 될 것이다.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온갖 모순과 갈등 속에서 부침하는 중생이다. 우리들이 화를 내고 속상해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외부의 자극에서라기보다 마음을 걷잡을 수 없는 데에 그 까닭이 있다. 인간의 마음이란 미묘하기 짝이 없다.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여유조차 없다. 그런 마음을 돌이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라고 옛사람들은 말한 것이다. -녹슨 삶을 두려워하라 이 육체라는 것은 마치 콩이 들어찬 콩깍지와 같다. 수만 가지로 겉모습을 바꾸지만 생명 그 자체는 소멸되지 않는다. 모습은 여러 가지로 바뀌나 생명 그 자체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생명은 우주의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하는 세계가 있을 뿐. 이미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들은 다른 이름으로 어디선가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원천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불멸의 영혼을 어떻게 죽이겠는가. 우리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내일 일을 누가 아는가? 이 다음 순간을 누가 아는가. 순간순간을 꽃처럼 새롭게 피어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매순간을 자기 영혼을 가꾸는 일에. 자기 영혼을 맑히는 일에 쓸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늙는다. 그리고 언젠가 자기 차례가 오면 죽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늙음이나 죽음이 아니다. 녹슨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삶이 녹슬면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 -물처럼 흐르라 사람은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살든 그속에서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 물이 흘러야 막히지 않고 팍팍하지 않으며 침체되지 않는다. 물은 한 곳에 고이면 그 생기를 잃고 부패하기 마련이다. 강물처럼 어디에 갇히지 않고 영원히 흐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삶의 종점에서 살 만큼 살다가 삶의 종점에 다다랐을 때 내게 남는 서은 과연 무엇일까.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원천적을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때 맡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물질이든 며예든 본질적으로 내 차지일 수 없다. 내가 이곳에 잠시 머무는 동안 그림자처럼 따르는 부수적인 것들이다. 진정으로 내 것이 있다면 내가 이곳을 떠난 뒤에도 전과 다름없이 이곳에 남아 있는 것들이어야 한다. 그러니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내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내가 평소 타인에게 나눈 친절과 따뜻한 마음ㅆ로 쌓아 올린 덕행만이 시간과 장소의 벽을 넘어 오래도록 나를 이룰 것이다. 따라서 타인에게 베푼 것만이 진정으로 내 것이 될 수 있다. 옛말에 '아무것도 가져 가지 못하고 자신이 지은 업만 따를 분이다'라고 한 뜻이 여기에 있다. 간디는 일찍이 이와 같이 말했다. '이 세상은 우리들의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롭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한 곳이다.' 나누는 일을 다음으로 미루지 말라. 이 다음은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이다. -수행자 진정한 출가 수행자는 세속적인 명예나 지위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안으로는 얻을 것이 없고 밖으로도 구할 것이 없어. 마은 진리에도 매이지 않는다. 밤에 꿈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망상과 번뇌가 많다. 수행자는 가진 것이 적듯이 생각도 질박하고 단순해야 한다. 따라서 밤에 꿈이 없어야 한다. 또 수행자는 말이 없는 사람이다. 말이 많은 사람은 생각이 밖으로 흩어져 여물 기회가 없다. 침묵의 미덕이 몸에 배야 한다. 수행자는 말을 하려고 할 때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가 하려는 이 말이 나 자신에게도 이롭고 듣는 쪽에도 이롭고, 이 말을 전해 들을 제삼자에게도 이로운 말인가를. 출가 수행자는 무엇보다 가난해야 한다. 자신의 분수와 가난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가난 속에서 도道의 마음이 우러난다. 가진 것이 많고 거느린 것이 많으면 출가의 뜻을 잃는다. 늘 깨어 있는 것이 출가 정신이라면 물질의 더미에서도 깨어나야 한다. 수행자에게 가난이란 맑음 그 자체다. 출가 수행자는 세속의 자로 재어 가난할수록 부자다. 모자락 텅 빈 그 속에서 넉넉한 충만감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무릇 수행자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자이다. 수행자는 미루지 말고 그때그때 행동해야 한다. 미루면 현재에 구멍이 뚫리고 말기 때문이다. 고독과 고립은 다르다. 수도자는 고독할 수 있어도 고립되어는 안된다. 고립은 공동체와으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독에는 관계가 따르지만 고립에는 관계가 따르지 않는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관계속에서 매 순간 형성되어 간다. 절대 고독이란, 의지할 곳 없이 외로워서 흔들리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 당당한 인간 실존의 모습이다. 수행자가 가는 길은 홀로 가는 길이라도 말도 있지만,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는 오묘한 도리를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수행자는 자기로부터 시작하라고 했지. 자기에게 그치라고 한 것이 아니다. 자기를 출발점으로 삼되 목표로 삼지는 말라는 뜻이다. 자기를 바로 알되 자기에게 사로잡히지는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산속으로 들어가 수도하는 것은 사람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발견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다. 우리가 사람들을 떠나는 것은 그들과 관계를 끊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그 길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말과 침묵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침묵을 지키지만, 마음속으로는 남을 꾸짖는다. 그는 쉼없이 지껄이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또 어떤 사람은 아침붙너 저녁까지 말을 하지만 침묵을 지킨다. 필요 없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묶이지 않는 들짐승처럼 수행자는 무릇 홀로이기를 원한다. 한 곳에 모여 공동채를 이루고 살면서도 저마다 은자처럼 살아간다. 서로 의지해 살면서도 거기에 매이거나 얽혀 들려고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독립과 자유를 원한다. 묶여 있지 않는 들짐승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숲 속을 다니듯, 독립과 자유를 찾아 혼자서 간다. -수류화개 水流花開 사람은 어떤 묵은 데 갇혀 있으면 안 된다. 꽃처럼 늘 새롭게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살아 있는 꽃이라면 어제 핀 꽃과 오늘 핀 꽃은 다르다. 새로운 향기와 새로운 빛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일단 어딘가에 집착해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안주하면 그 웅덩이에 갇히고 만다. 그러면 마치 고여 있는 물처럼 섞기 마련이다. -날마다 출가하라 나는 줄곧 혼자 살고 있다. 그러니 내가 나를 감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수행이 가능하겠는가. 홀로 살면서도 나는 아침저녁 예불을 빼놓지 않는다. 하루를 거르면 한 달을 거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삶 자체가 흐트러진다. 우리는 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생명이 요구하는 필수적인 과제이기 때문이다. 타성의 늪에서 떨치고 일어서는 결단이 필요하다. 저마다 자기의 일상생활이 있다. 자기의 세계가 있다. 그 일상의 삶으로부터 거듭거듭 떨쳐 버리는 출가의 정신이 필요하다. 머리를 깍고 산이나 절로 가는 것이 아니다. 비본질적인 것들을 버리고 떠나는 정신이 필요하다. 홀로 있으려면 최소한 인내가 필요하다. 홀로 있으면 외롭다고 해서 뭔가 다른 탈출구를 찾으려는 버릇을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처럼 자기 영혼의 투명성이 고이다가 사라져 버린다. 홀로 있지 못하면 삶의 전체적인 리듬을 잃는다. 홀로 조용히 사유하는, 마음을 텅 비우고 무심히 지켜보는 그런 시간이 없다면 전체적인 삶의 리듬 같은 것이 사라진다. 삶의 탄력을 잃게 된다. -자신의 등뼈 외에는 내소망는 단순하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일이다. 느낌과 이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 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 단순한 삶을 이루려면 더러는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사람은 홀로 있을때 단순해지고 순수해진다. 이때 명상의 문이 열린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살려고 한다. 홀로 있다는 것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순수하며 자유롭고,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서 당당하게 있음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디에도 기대서는 안 된다. 오로지 자신의 등뼈에 의지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 진리에 의지해야 한다. 자신의 등뼈 외에는 어느 것에도 기대지 않는 중심 잡힌 마음이야말로 본래의 자기이다. -현재의 당신 무슨 소리를 듣고, 무엇을 먹었는가. 그리고 무슨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했으며 한 일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현재의 당신이다. 그리고 당신이 쌓은 업이다. 이와 같이 순간순간 당신 자신이 당신을 만들어 간다. 명심하라. -회심 남을 미워하면 저쪽이 미워지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미워진다. 부정적인 감정이나 미운 생각을 지니고 살아가면, 그 피해자는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가면 내 삶 자체가 얼룩지고 만다. 인간관계를 통해 우리는 삶을 배우고 나 자신을 닦는다. 회심回心, 곧 마음을 돌이키는 일로써 내 삶의 의미를 심화시켜야 한다. 맺힌 것은 언제가 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 생에 풀리지 않으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 미워하는 것도 내 마음이고, 좋아하는 것도 내 마음에 달린 일이다. -사는 것의 어려움 이 세상을 고해라고 한다. 고통의 바다라고, 사바 세계가 바로 그 뜻이다. 이 고해의 세상, 사바 세계를 살아가면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만 바랄 수는 없다. 어려운 일이 생기 마련이다. 어떤 집안을 들여다봐도 밝은 면이 있고, 어두운 면이 있다. 삶에 곤란이 없으면 자만심이 넘친다. 잘난 체하고 남의 어려운 사정을 모르게 된다. 마음이 사치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보왕삼매론은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고 일깨우고 있다. 또한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고 말한다. 자신의 근심과 걱정을 밖에서 오는 귀찮은 것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삶의 과정으로 여겨야 ㅎ낟. 숙제로 생각해야 한다. 자신에게 어떤 걱정과 근심거리가 잇다면 회피해선 안 된다. 그걸 딛고 일어서야 한다. 어떤 의미가 있는가. 왜 이런 불행이 닥치는가. 이것을 안으로 살피고 딛고 일어서야 한다. 저마다 이 세상에 자기 짐을 지고 나온다. 그 짐마다 무게가 다르다. 누구든지 이세상에 나온 사람은 남들이 넘겨볼 수 없는 짐을 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그 인생이다. 세상살이에 어려움이 있다고 달아나서는 안 된다. 그 어려움을 통해 그걸 딛고 일어서라는 새로운 창의력, 의지력을 키우라는 우주의 소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용서 용서는 가장 큰 수행이다. 남을 용서함으로써 나 자신이 용서 받는다. 날마다 새로운 날이다. 묵은 수렁에 갇혀 새날을 등지면 안된다. 맺힌 것을 풀고 자유로워지면 세상 문도 활짝 열린다. -원한의 칼 우주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이다. 우리는 서로서로 때문에 존재한다. 서로가 서로의 한 부분이다. 증오라는 원한의 칼로 남을 해치려고 한다면 그 칼이 자기 자신을 먼저 지르지 않고는 맞은편에 닿을 수 없다. -개체와 전체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은 하나의 느낌이나 자세가 아니다. 그것은 온전한 삶의 방식이고, 우리 자신과 우리 둘레의 수많은 생명체들에 대한 인간의 신성한 의무이다. 삶의 기본적인 진리는 남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나쁜 사람뿐 아니라 온갖 생명이 포함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방식으로 그 자신의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만의 편의나 이익을 위해 남을 간섭하고 통제하고 지배해서는 안 된다. 개체와 전체의 관계는 조화와 균형으로 이루어질 때 가장 바람직핟. 이 조화와 균형이 깨지면 이변이 생긴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 조화와 균형이 무너져 오늘날의 지구는 온갖 환경 재난에 시달리고 있다. 흙의 은혜에 대해 늘 감사하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 물에 대해서, 따뜻한 햇볕에 대해서, 그리고 공기에 대해서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무엇 덕분에 숨을 쉬며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오해 '나는 당신을 죽도록 사랑합니다' 하는 말의 정체는 '나는 당신을 죽도록 오해합니다'일지도 모른다. 누가 나를 추켜세운다고 해서 우쭐댈 것도 없고, 헐뜯는다고 해서 화를 낼 일도 못 된다. 그건 모두가 한쪽만을 보곡 성급하게 판단한 오해이기 때문이다. 오해란 이해 이전의 상태가 아닌가. 문제는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달린 것이다. 실상은 말 밖에 있는 것이고 진리는 누가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는다. 온전한 이해는 그 어떤 관념에서가 아니라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 이전에는 모두가 오해일 뿐이다. -빈 들녘처럼 겨울은 우리 모두를 뿌리로 돌아가게 하는 계절, 시끄럽고 소란스럽던 날들을 잠재우고 침묵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계절 그동안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계절 자신의 분수와 속얼굴을 들여다보는 계절이다. 이제는 침묵에 귀를 기울일 대이다. 소리에 찌든 우리들의 의식을 소리의 뒤안길을 거닐게 함으로써 오염엣 헤어나게 해야 한다. 저 수목들의 빈 가지처럼 허공에 귀를 열어 소리 없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겨울의 빈 들녁처럼 우리들의 의식을 텅 비울 필요가 있다. -최초의 한 생각 명상은 조용히 지켜보는 일이다. 사물의 실상을 지켜보고 내면의 흐름을, 생각의 실상을 고요히 지켜보는 일이다. 보리달마는 '마음을 살피는 한 가지 일이 모든 현상을 거두어들인다' 고 했다. 지식은 기억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지혜는 명상으로부터 온다. 지식은 밖에서 오지만 지혜는 안에서 움튼다. 안으로 마음의 흐름을 살피는 일, 이것을 일과 삼아 해야 한다. 모든 것이 최초의 한 생각에서 싹튼다. 이 최초의 한 생각을 지켜보는 것이 바로 명상이다. 명상은 안으로 충만해지는 일이다. 안으로 충만해지려면 말고 투명한 자신의 내면을 무심히 들여다보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명상은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훈련이다. 명상은 절에서 선방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활짝 열기 위해 겹겹으로 둘렀아니, 겹겹으로 얽혀 있는 내 마음을 활짝 열기 위해 무심히 주시하는 일이다. -깨달음의 길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오직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지혜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비의 길이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속속들이 지켜보면서 삶을 매 순간 개선하고 심화시켜 가는 명상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다. 이 지혜와 자비의 길을 통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지녀 온 불성과 영성의 씨앗이 말고 향기롭게 꽃피어난다. 사랑이 우리 가슴속에 싹트는 순가 우리는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진저한 탄생이고 부활이다. 세상이란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얼굴이고, 우리 삶의 터전이다. 우리가 마음의 수양을 하고 개인의 수행을 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세상에 도달하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만 멈추라는 것이 아니다. -참고 견딜 만한 세상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꽃이 있다. 다 꽃씨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엣 성인 말했듯이, 역경를 이겨 내지 못하면 그 꽃을 피워 낼 수 없다. 하나의 씨앗이 움트기 위해서는 흙 속에 묻혀서 참고 견뎌 내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래서 사바 세계, 참고 견디는 세계라는 것이다. 여기에 감추어진 삶의 묘미가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사바 세계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한다. 극락도 지옥도 아닌 사바세계, 참고 견딜 만한 세상, 여기에 삶의 묘미가 있다. -얼마나 사랑했는가 얄베르 까뮈는 말했다. '우리들 생애의 저녁이 이르면, 우리는 얼마나 타인을 사랑했는가를 놓고 심판 받을 것이다.' 타인을 기쁘게 해줄 때 내 자신도 기쁘고 타인을 괴롭게 하면 내 자신도 괴롭다. 타인을 괴롭게 하면 내 자신도 괴롭다. 타인에 대해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그 타인을 행복하게 할 뿐 아니라 내 자신의 내적인 평화도 함께 따라온다. 감정은 소유되지만 사랑은 우러난다. 감정은 인간 안에 깃들지만 인간은 사랑 안에서 자란다. -자기를 배우는 일 불교를 배운다는 것은 곧 자기를 배움이다.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곧 자기를 잊어버림이다. 자기를 잊어버림은 자기를 텅 비우는 일. 자기를 텅 비울 때 비로소 헤험의 세계와 하나가 되어 그 어떤 것에 대립하지 않고 해탈된 자기를 알게 된다. 해탈된 자기란 본래적인 자기. 부분이 아닌 전체인 자기를 가리킴이다. -묵은해와 새해 누가 물었다. 스님은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느냐고. 나는 대답했다. '나는 오늘을 살고 있을 분 미래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는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고 있다. 바로 지금이지 그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다음 순간을, 내일 일을 누가 알 수 있는가. 학명 선사는 읊었다. '묵은해니 새해니 분별하지 말라. 겨울 가고 봄이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 보라,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너는 이세상에 어디에 있는가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너에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너는 네 세상 어디쯤에 와 있는가? 마르틴 부버가 <인간의 길>에서 한 말이다. 이 글을 눈으로만 스치고 지나치지 말고 나지한 자신의 목소리로 또박또박 자신을 향해 소리내어 읽어 보라. 자기 자신에게 되묻는 이 물음을 통해 우리 각자 지나온 세월의 무게와 빛깔을 얼마쯤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때때로 이런 물음으로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지난 한 해를 어떻게 지나왓는지,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이웃을 만나 우리 마음을 얼마만큼 주고 받았는지. 자식들에게 기울인 정성이 참으로 자식을 위한 것이었는지 혹은 내 자신을 위한 것이었는지도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안으로 살피는 일에 소홀하면 기계적인 무표정한 인가능로 굳어지기 쉽고, 동물적인 속성만 쌓여 가면서 삶의 전체적인 리듬을 잃어버린다. 우리가 같은 생물이면서도 사람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되돌아보면서 반성할 수 있는 그런 기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나직한 목소리로 물어보라.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이와 같은 물음으로 인해 우리는 저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진정한 자신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삶의 가치와 무게를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 것인가도 함께 헤아리게 될 것이다.




    '사색노트 > 마음의 뜨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전거 여행  (0) 2006.06.16
    법정 잠언집  (0) 2006.06.14
    법정 잠언집  (0) 2006.06.12
    선물이 되는 사람  (0) 2006.06.11
    바보엄마  (0) 2006.06.09